오사카에는 왜 ‘백제’라는 이름이 많을까? 오사카를 여행하다 보면 ‘백제’라는 명칭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백제역, 백제거리, 백제신사, 백제군 등 다양한 장소에 ‘백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왜 일본 제2의 도시인 오사카에 이렇게 많은 ‘백제’ 관련 명칭이 존재할까?
이를 이해하려면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660년,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했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갔으며, 백제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는, 당나라의 행정구역인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어 당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초대 도독으로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백제 멸망 이후에도 항복하지 않은 백제군은 백제 부흥운동(독립운동)을 일으켰다. 귀실복신, 도침, 흑치상지, 부여자신, 부여풍 등이 중심이 되어 부흥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에 일본(당시 왜국)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며 물자를 제공했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은 백제 부흥군을 강력히 진압하기 시작했다. 신라 중앙군은 거열성을 점령한 후 본대를 안덕으로 이동시켰고, 일부 병력은 전라도 남부 지역에 있던 백제 부흥군의 거점을 공격했다. 궁지에 몰린 백제 부흥군은 일본에 지원을 요청했다.
출처 : wikipedia
일본은 백제 부흥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구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663년, 카미쓰케노노키미 와카코(上毛野君稚子)를 비롯한 장수들이 이끄는 약 3만 명의 왜군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이들은 백제 부흥군과 연합하여 나당연합군과 백강(지금의 금강 하류)과 주류성(현재 충남 서천 또는 전북 부안 일대)에서 맞섰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약 500만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3만 명의 군대를 파견한 것은 일본으로서도 국운을 건 결단이었다.
그러나 당나라군을 이끈 유인궤 장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했고, 체계적인 전술 훈련을 받은 당나라 군대는 압도적인 전력을 보였다. 당군은 화공(火攻) 전술을 활용하여 왜군의 함선을 대량으로 불태웠고, 결국 왜군과 백제 부흥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궤멸되었다. 결국 왜군은 패배했고, 남은 병력과 백제 유민 2천여 명은 일본으로 대규모 철수를 감행했다.
(중국 사서 구당서) 仁軌遇扶餘豐之眾於白江之口,四戰皆捷。焚其舟四百艘,賊眾大潰,扶餘豐脫身而走。 → "유인궤(劉仁軌)는 백강(白江) 어귀에서 부여풍(扶餘豐)의 군대와 맞서 네 차례의 전투를 벌였으며,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당군은 부여풍의 전함 400척을 불태웠으며, 백제 부흥 군과 왜군은 대패하여 크게 무너졌다. 부여풍은 가까스로 도망쳤다."
偽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士女及倭眾並降。百濟諸城皆復歸順。孫仁師與劉仁願等振旅而還。 → "백제의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 부여충지(扶餘忠志) 등이병사들과 여성들, 그리고 왜국 군사들과 함께 항복하였다. 백제의 모든 성이 다시 당나라의 통제 아래 놓였다. 당나라 장수 손인사(孫仁師)와 유인원(劉仁願)은 승전한 후 귀환하였다."
패퇴한 왜군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은 주로 오사카(난바) 지역에 정착했다. 이들 중에는 왕족과 귀족뿐만 아니라 학자, 기술자, 예술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백제 유민들은 일본 문화와 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본의 건축, 불교, 문자 체계, 도예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백제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백제계 이주민들은 일본 조정에서 중용되었으며, 오사카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 백제와 관련된 지명이 남게 되었다.
백강 전투(663년)는 단순한 전투를 넘어 한반도에서 벌어진 최초의 국제전쟁이었다. 이를 거시적으로 보면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간의 충돌로 볼 수도 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동아시아의 정치 질서는 크게 재편되었다.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고, 일본은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방어적인 태세로 전환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일본열도 중심의 중앙집권화를 가속화했다.
백강전투 이후에도 한반도에서 벌어진 임진왜란(1592), 청일전쟁(1894),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한국전쟁(1950) 등도 어떤 의미에선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 간의 충돌이라는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현재까지도 한반도를 둘러싼 내부와 외부의 갈등 역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필연적 운명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