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사람 친구입니다 ep. 남해 여행
카페 식사 메뉴에 알리오 올리오가 있길래 주문했다. 모든 메뉴에 'with 소시지'나 'with 슈니첼'이 붙는데 알리오 올리오만 유일하게 그렇지 않았다. 치킨 스톡이 들어가는지 마늘이랑 올리브유 말고 다른 재료는 어떤 게 들어가는지 물으니 주방에 있던 직원이 나와 직접 답해주었다. 닭가슴살, 치즈 가루, 치킨스톡 다 빼 달라고 하니 "네? 그거 빼면 뭐 드시게요?" 하고 물었다. 나는 괜찮으니 그냥 소금, 후추로만 간을 해달라고 했다. 직원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동벨을 받아 테라스로 돌아왔다. 바닷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루프탑에 앉으니 마을과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이어폰을 꺼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못 듣겠더니 오늘은 살짝 나아졌다. 그래도 가사 있는 곡은 힘들어서 피아노 연주곡을 들었다. 아는 곡에 묻어 있는 기억을 들추고 싶지 않아서 유튜브에 들어가 누군가 선곡한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초면인 곡이 연달아 나와 잔잔한 리듬으로 하늘과 맞닿은 바다 풍경 위를 떠다녔다. 먼바다에는 볕이 쏟아져 반짝이는 윤슬이 찰랑거렸다.
문득 익숙한 곡이 흘러나와 어깨를 토닥이고 등을 쓸어내렸다. 지나간 행복이 몽글몽글 실려 있는, 씻어도 씻어도 향이 남아 아른거리는 곡. 도서관을 오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을 쓰다 노을 지는 언덕을 바라보며 뿌듯하게 귀가하던 날들이 스며 있는 곡. 쓰고 있는 글 하나만 생각하면 될 것 같은 기분, 앞으로도 이렇게 살면 되겠다 싶은, 맑고 충만하던 기분. 기를 쓰고 피해 다녔는데 듣고 나니 그리웠던 것 같았다. 이렇게 하늘이 파랗고 해가 쨍하고 이렇게 거대한 구름이 동화책 그림처럼 떠 있는데도 눈물이 날 뻔했다.
어제 새벽 어스름한 시각에 짐가방을 메고 나와 시외버스를 탔다. 휴가를 긁어 모아 도망치듯 남해에 왔다. 일상으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떠나오고 싶었다. "걱정 말고 푹 쉬다 와"하고 등을 토닥여준 동료에게 고마웠지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우리 팀은 사람이 많지 않아 한 사람이 빠지면 남은 사람의 며칠이 고된 편이었다. 버스 밖 풍경은 내내 흐려지다 맑아지다를 반복했다. 내겐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볼 틈이 필요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일까. 어젠 이른 저녁에 누웠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꿈에서는 사무실 분위기가 살얼음판이었다. 디데이는 코앞인데 의견은 모아지지 않고 상황은 점점 산으로 흘러갔다. 심지어는 동료 둘이 언성을 높이며 다퉜고 서로에게 화를 퍼부은 채 나가버렸다. 나는 덩그러니 남아 그 광경을 반복해서 목격했다. 깨기 직전에는 대외비 보고 자료를 애먼 단톡방에 올리기까지 했다. 참 현실적인 악몽이었다. 요즘 일터의 나는 사람들의 찌그러진 미간이나 한숨 소리, 틀어진 자세, 문서를 넘기는 손짓에서 부정적인 감정들이 새어 나올 때마다 꼼꼼히 피로감을 느끼곤 했다.
진동벨이 울려 받으러 간 알리오 올리오에는 미니 새송이 버섯과 양파가 듬뿍 들어 있었다. "다 빼면 뭐 드시게요?"라고 묻던 직원이 넣은 것 같았다. 메뉴 사진에는 버섯이 없었던 것 같은데. 감사한 일이었다. 여행자에게 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부지불식간에 마음이 따땃해지듯이 기분이 훌쩍 나아졌다. 어제 오늘 내내 호밀빵 하나로 연명하다 숙소를 나선 터라 한 주먹만큼의 버섯이 너무도 귀하게 느껴졌다.
동글동글한 버섯을 하나씩 집어먹고 나니 자작한 마늘 기름에 초승달 모양으로 잘린 양파들이 얇게 썬 올리브와 함께 잠겨 있었다. 알리오 올리오를 달게 먹기도 하나 싶었지만 먹다 보니 은근히 어울렸다. 익숙한 맛은 아니었지만 맛있었다.
해질녘엔 해안 산책로를 걸었다. 먹구름이 잔뜩 껴서 노을은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캄캄해진 하늘엔 별 하나 없었다. 모래언덕에 서서 어두운 바다와 철썩이는 파도를 보는데 이렇게까지 앞날이 두려웠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언제부턴가 일이 주는 보람보다 일이 주는 스트레스가 더 커져버린 것 같았다. 복귀하면 다시 스트레스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곳으로 돌아갈 텐데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밤에는 잠이 오질 않아 티비를 켰다. 이곳에 묵었던 누군가 받아둔 영화들을 훑어보다 가장 무해할 것 같은 영화를 골랐다.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다치는 액션도 아니고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 주고 상처 받는 드라마도 아닌, 표정과 몸짓이 사람의 그것을 연상시키지 않을 것 같은 <레고 무비>였다. 그러나 영화에선 레고 주인공도 맥주에 소시지, 치킨윙을 먹었다. 더 보지 않고 티비를 껐다.
비구름이 해를 가려 아침인데도 어두웠다. 오전에는 반경 2km 이내 편의점을 돌아다녔다. 어떤 곳에도 샐러드는 없었다. 관광지 주변이라 그런지 맥주와 안주, 냉동실 가득 레토르트 식품은 종류별로 채워져 있었지만 애타게 찾던 과일이나 샐러드는 보이지 않았다. 골목에 간간이 보이는 식당도 생선구이나 해물탕뿐이었다. 칼국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슬슬 손발이 시리고 몸이 으슬으슬했다. 따뜻한 두유 두 병을 사서 양손에 하나씩 쥐고 서둘러 돌아왔다. 일을 받으면 그저 해야 하는 것처럼 이곳에서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오후엔 비가 내렸다. 멍하니 천장을 보며 누워 있다가 허기를 참을 수 없어 우산을 챙겨 숙소를 나섰다. 어제 먹은 알리오 올리오라도 먹을 셈이었다. 우산을 써도 바지와 신발이 금세 젖는 장대비가 내렸다. 계곡물이 내려오는 듯한 언덕을 첨벙거리며 올라 카페에 도착했다. 커다란 유리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바글거리던 사람 대신 오밀조밀한 화분들만 문가에 모여 흠뻑 비를 맞고 있었다. 화요일, 휴일이구나. 그러고 보니 대로변까지 즐비한 카페나 식당도 전부 불이 꺼져 있었다.
빈손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우산을 접어 모서리에 세우자 현관 바닥이 물로 흥건했다. 바짓단과 운동화 끈에서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있는 힘껏 몸을 움츠려도 소름이 돋았다. 나는 어쩌자고 계획도 없이 여기까지 와서. 먹을 것도 흔치 않은 여행지에. 샐러드에도 파스타에도 소시지와 슈니첼이 들어가는 독일마을에. 바다 풍경만 생각하고 왔다가 하릴없이 쫄쫄 굶게 생겼다. 배가 고프고 게다가 춥다. 내가 자초한 일이지만. 몹시 서럽다.
이럴 땐 나도 사람인지라 무력한 기분이 든다. 서울 만한 먹구름이 계속해서 비를 쏟아붓는데 나 혼자 방에 들어차는 물을 퍼내겠다고 열심히 바가지로 퍼내고 퍼내는 느낌. 서울 만한 구름이 물을 퍼붓고 있는데.
저 멀리서 우울이 쳐들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남은 휴가를 감기에 걸려 보내고 싶진 않았다. 나는 바짓단을 대충 걷어 올리고 방으로 들어가 차갑게 식은 두유 한 병을 머그잔에 따랐다. 전자레인지에 넣고 타이머를 맞춘 다음 젖은 옷을 벗고 제일 두툼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보일러 온도를 올리고 수면양말도 신었다.
'그래. 까짓 거 몇 끼 굶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세상 끝나는 것도 아니다. 해 뜨는 날 있으면 비 오는 날도 있는 거지.' 나는 방구석 빈백에 몸을 파묻고 담요를 덮었다.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했다.
검은콩 두유는 오전에 마신 두유보다 밀도가 진하고 고소했다. '그래. 배고프면 또 두유 사 오면 되지.' 잔을 반쯤 비우고 일어나 침대의 전기담요를 켰다. 젖은 신발을 벽 모서리에 비스듬하게 세웠다. 젖은 바지 끝부분과 양말을 조물조물해서 빨았다. 탁탁 털어 방바닥에 펼쳐두고 욕실로 들어가 뜨끈한 물로 샤워를 했다.
창밖엔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었다. 처마 끝에 맺힌 빗방울이 화단으로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따뜻하게 덥혀진 침대에 엎드려 이불을 뒤집어썼다. 여행노트를 펼치고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다.
'비 내리는 날만 계속되면 홍수가 나고 해 뜨는 날만 계속되면 가뭄이 든다. 자꾸 까먹지만 나무가 자라는 데는 해도 필요하고 비도 필요하다. 다음부터 여행 갈 땐 식량 대비를 철저히 합시다. 되도록 취사가 가능한 숙소를 잡고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으로. 내일은 집에 가자마자 라면을 끓여 먹을 것이다.'
추신 : 당시엔 몰랐는데 두유도 비건이 있고 아닌 게 있습니다. 진짜 콩물만 들어간 무첨가 두유가 비건이고, 첨가물이 들어간 경우에는 비건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해요. 칼슘이나 비타민D 같은 첨가물에 동물성 원료가 쓰인다고 하네요. 제가 알고 있는 비건 두유는 매일 두유, 약콩 두유, 연세 두유가 있습니다.
커버 사진 : 쏟아지던 비가 그친 뒤 성큼 다가온 노을을 찍었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 그 시절 남해 여행의 기억과 묵은 감정들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며칠을 회색 일몰만 보다 오랜만에 붉게 물든 하늘을 보고 무척 반가웠던 기억이 납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릴 때의 기억도요. 라면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하얗게 고슬거리는 밥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하는 감정들이 생생해지곤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