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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스키 Oct 25. 2022

이제야 물어봐서 미안해

비건 사람 친구입니다 ep. 제주 출장

-혹시 짬뽕에 고기랑 해물 빼고 해 주실 수 있죠? 육수도 그냥 맹물로 해주세요.






제주에서의 지난 이틀은 거리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여러 협력업체를 방문하느라 때맞춰 끼니를 먹기 어려웠다. 이동하는 중간중간 차에서 샌드위치,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그러나 오늘은 업체 별로 모니터링 보고서만 작성해서 보내면 임무 완수였다. 제주 이외에도 써야 할 보고서가 70개 넘게 쌓여있긴 했지만.


그래도 제주까지 왔는데 가기 전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묻자 선배는 아침 댓바람부터 대뜸 "우리 짬뽕 먹으러 가자!"고 했다. "짬뽕? 중국집이에요?" 하고 묻자 선배는 "너 먹을 것도 있어"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고기랑 해물 빼 달라고 하면 큰 무리 없이 해줄 거야. 그리고 메뉴 보니까 가지덮밥이랑 마파두부밥도 있어. 어때!" 나는 외투를 입으며 그러자고 했다. "오늘은 제가 운전할게요"


식당 앞엔 대기 줄이 길었다. 대기 열은 차를 세운 골목길까지 빙 돌아 이어졌다. 챙이 넓은 비치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어깨에 카메라를 멘 사람들, 셀카봉에 스마트폰을 매달아 촬영 중인 사람들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안을 살펴보니 테이블은 8개였다. "번호표는 따로 없고, 30분 정도 걸리세요."라고 안내한 직원은 다시 분주히 서빙을 이어갔다. 유리문에는 A4용지에 인쇄한 작은 글씨로 '주말엔 차돌박이해물짬뽕만 주문 가능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아차 싶었다. 평소라면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있는지 다른 변수는 없는지 직접 확인했을 텐데, 이틀간 쉼 없이 몰아친 일정을 소화하느라 피곤했던 탓인지 미처 검색해 볼 생각을 못했다. 선배는 난감한 표정으로 직원에게 다른 메뉴는 아예 안 되냐고 묻고 있었다. 직원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빼 달라고 하면 빼주시겠지.’ 이럴 땐 운에 맡겨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진에 정신 팔려 설명을 놓쳤나봐. 오늘 짬뽕밖에 안 된대." 고민하던 선배가 차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에이 그래도 40분이나 운전해서 왔는데 그냥 먹어요. 빼 달라고 하면 되지." 나는 줄 끝에 멈춰 서 선배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제주까지 왔잖아요."


선배는 평소에 면 요리를 특별히 사랑하는 미식가였다. 우동, 냉면, 고추짬뽕 같은 메뉴가 선배의 베스트 맛집에 올라 있었고 오는 길에도 내내 애월 어느 고기국수집과 성산항 쪽 문어라면이 그렇게 인생맛집이었다면서 신이 나서 추억들을 늘어놓았다. 짬뽕은 해물이 신선한 지역에서 가장 맛있다는 선배의 지론도 반복 재생되었다. 나는 혹여 내가 못 먹더라도 짬뽕을 먹도록 하고 싶었다.






-음? 그렇게는 어려운데.. 그거 다 빼면 음식을 어떻게 팔어? 맹물로는 맛 내기가 어려워. 그냥 먹지 왜. 고기 싫어해요?


입구에 선 사장님은 주말이라 따로 주문이랄 게 없고 손님이 오는 즉시 명 수대로 짬뽕이 나온다고 말을 이었다. 저기 적혀 있지 않느냐고. 홀에 보이는 사람들 다 똑같은 거 먹고 있다고 말하며 손을 뻗어 빈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기 창가 쪽 끝 테이블 앉으세요"


-사장님, 고기 안 먹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냥 들어갈 순서에 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대신 야채 많이 넣어주시면 되잖아요.


선배는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나한테 미안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사장님도 당황한 눈치였다. 선배 성격에 그냥 나간다고 할까봐 나는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사장님. 저희 그냥 하나만 주세요. 짬뽕 하나만요.


나는 "그냥 다른 데 갈까?" 하고 묻는 선배의 등을 떠밀어 자리로 가서 앉혔다.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빨간 국물의 짬뽕이 테이블에 놓였다. 선배가 보여준 블로그 사진대로 재료가 아낌없이 들어가서 푸짐해 보였다. 나는 젓가락을 꺼내 선배에게 들이밀며 말했다.


-자, 저는 괜찮으니까 기분 풀고 맛있게 먹어요. 맨날 일 하느라 바쁜데 제주를 또 언제 오겠어. 천천히 먹어요. 체하지 말고.


나는 스테인리스 컵에 물을 따라 선배 쪽에 놓았다. "숙소 가는 길에 큰 빵집 하나 있어요. 거기 가면 먹을 수 있는 거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드셔요" 선배는 마음이 불편한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야.. 너무 미안하다. 어떡하냐.

-아이고 불어요. 저 안 굶을 거예요. 선배가 먹어야 내가 먹으러 가지.


선배는 "그래! 야, 얼른 먹을게!" 하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근데 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런 걸 어떻게 매 끼니 하고 있냐." 급하게 먹지 말라는 내 말에 생각보다 훨씬 맵다며 콧잔등에 맺힌 땀을 닦던 선배가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그냥 하는 거죠 뭐."


 스테인리스 컵에 찬물을 따라 마시는데 그간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 정도의 일은 별 타격감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동료나 친구가 도리어 내게 '오늘만 그냥 먹으면 안 돼?'라고 물었다면 그것이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너 빵집 말고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걸로 찾아봐. 거리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운전할게.

-우리 이미 시간 많이 지났어요. 보고서 써야죠. 들어가서 바로 시작해도 오늘 안에 못 끝낼 것 같은데.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답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밤새서라도 네 몫까지 해놓을 테니까 너는 하다가 피곤하면 먼저 자. 내일 아침 전까지만 보내면 돼. 내가 통화해둘게. 오케이?






한 시간 거리를 달려 두부, 버섯 토핑이 가능한 샐러드 포케집으로 이동했다. 출장 3박 4일 중 처음으로 먹는 따뜻하고 갓 지은 밥이었다.

 내가 잘 구워진 두부와 버섯을 골라 먹고 자작하게 남은 소스에 채소와 현미밥을 비벼 먹는 동안 선배는 배가 불러 졸리다며 캔 콜라를 홀짝였다.


-근데 점심 두 번 먹으니까 대화도 길게 하고 좋네. 일하러 온 거긴 하지만. 네가 매번 사무실에서 도시락 먹으니까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선배는 안경을 벗어 티셔츠 소매로 꼼꼼히 문질러 닦더니 다시 썼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야 물어봐서 미안하다. 너는 어떻게 하게 된 거야? 비건?

-비건이요? 음..


나는 심각해지지 않고 암울해지지 않고 담백하게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말을 고르게 됐다. 사실 비건을 결심한 이유를 이야기할 때 격해지지 않기란 나에겐 정말 어려운 일이다. 얘길 시작하면 농장에서 실험실에서 인간이 동물에게 자행하는 일들이 떠오르고 그럴 땐 도무지 덤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배는 잠자코 내 말을 기다려주었다.


-저는요. 동물들한테 무심하고 싶지 않아요. 모를 땐 모르니까 익숙한 방식대로 살았지만 이젠 모르지 않고 알아버렸고. 식사는 제가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어쩌면 거의 유일한 선택지잖아요. 기업에 찾아가서 따지는 것보다 쉽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설득하는 것보다 쉽고 동물들이 그렇게 사는 걸 외면하는 것보다 쉬워서요. 저한텐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가깝고 쉬운 방식이에요. 그래서 해요.


선배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듣다가 남은 콜라를 털어 넣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바닥에 시선을 둔 채 곰곰이 끄덕이더니 물었다.


-그래도 오늘처럼 인식이나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으니까 불편할 때도 많지 않아? 어려운 사람들하고 식사할 자리도 있을 거고.

-불편할 일이야 많죠. 많지만 동물들 불편한 거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인식이나 인프라는 저 같은 사람이 늘어날수록 서서히 갖춰지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게 '다 마련되면 해야지’ 하다간 영영 안 바뀔 것 같았어요.


선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네" 깊은 한숨을 쉬더니 시선을 올려 나를 보며 말했다. "멋있어"


-그래서 오늘 선배가 ‘고기 안 먹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라고 말해줘서 고마웠어요. 그 사장님께는 오늘 그 말이 황당했겠지만 새로운 경험이 됐겠죠.


선배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남은 밥을 싹싹 긁어먹고 일어났다. "갈까요? 이제 가서 일합시다."


우리는 포케집을 나와 차를 세워둔 골목으로 걸었다. 선배는 차 쪽으로 스마트키를 눌러 도어락을 풀며 말했다.

-근데 우리는 왜 이런 얘기 여태 안 했지. 일만 했나 우리?

-그렇다기보다는 제가 굳이 안 했죠.

-왜?

-제가 느끼기엔 어느 정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이 물어보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한테는 얘기해도 역효과 날 수 있더라고요. 그럼 저도 버겁고요.

-아.. 진지하게 묻는 사람한테만 얘기하는구나. 가벼운 질문엔 가볍게 답하고?

-버전이 여러 가지 있죠. 오늘 선배한테 한 얘기는 엄청 돌려 말한 거예요.

-야.. 무서운 녀석. 그럼 다음에 물어볼 땐 팩트 폭격이겠네.


선배는 “야.. 이 무섭고 멋있는 녀석” 하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벨트를 매고 내비게이션에 숙소 주소를 입력했다. 창문을 내리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돌담길과 오름, 푸른 숲길이 창밖으로 지나갔다. 해안을 맞댄 도로를 달릴 때는 언덕을 넘을 때마다 먼바다에서 물빛이 반짝거렸다. 


숙소 주변에 다다르자 하강 중인 비행기가 배를 보이며 파란 하늘을 횡단했다. 주차를 마치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긴 선배가 말했다.

-그 네가 봤다는 다큐나 책 같은 거 알려줄래? 비행기 탈 때 보게.

-오!? 진심이십니까? 

나는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봐보게. 일단 보고. 

선배는 덤덤한 표정으로 스마트폰과 키를 챙겼다.


-오케이. 풀 패키지로 추천 가능. 링크 보내 놓을게요.

-그래. 내일은 뜨끈한 아침 먹을 곳 미리 찾아보자. 또 스벅 가서 바나나 사지 말고.









커버 사진 : 포케집에서 먹은 샐러드볼입니다. 당시엔 비건 식당도 많지 않고 휴무일이 걸려 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지만 그동안 제주에도 비건 식당이 많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제주 여행을 계획 중인 비건이라면 휴무일과 브레이크 타임도 꼼꼼히 챙겨보시고 맛있는 음식 잘 챙겨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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