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리븐 Jun 27. 2024

차별은 교육으로 극복할 수 있다.

당신이 누군가를 차별하다는 것은 당신의 무지를 보여준다.

이 글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의 '역사에 정의는 없다' 파트를 읽고 저의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1776년 미국인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선언했으나, 이와 동시에 새로운 위계질서를 확립했다. 가령 백인과 흑인이 평등한 인권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흑인은 열등한 인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상으로 차별을 합리화했다. 또 부자와 가난뱅이는 서로 계급이 다르다고 선언했다. 이 시기에 평등이란 단지 법이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등에는 돈과 교육, 건강보험과 같은 것은 해당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러한 위계질서를 합리화될 수 있었을까? 상상 속의 질서를 통해서 가능했다. 신이 부여한 것이라는 믿음 또는 자연 불변의 법칙이라고 보았다. 가령 사람들은 노예는 신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며 노예의 존재를 당연시했다. 함무라비는 노예를 신이 정해놓은 것이라고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에게는 '노예의 본성'이 있다고 보았다. 사회적 지위란 곧 이들이 갖고 있는 본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의 진실은 극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 만든 상상 속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차별을 받아야 한다는 생물학적인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수많은 차별을 받아왔다. 인도 전통 사회는 카스트 제도에 따라, 오토만 사회는 종교에 따라, 미국은 인종에 따라 사람을 등급으로 나눴다.



최악의 사실은 이들에게 주입된 '차별의 질서'가 바뀌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령 인도의 카스트는 청결과 불결의 개념으로 계급 간의 접촉을 금했다. 접촉한다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오염될 수 있으므로 접촉을 금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오늘날 인도 정부는 이런 차별을 철폐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있다.



미국의 인종 차별도 마찬가지다. 흑인이 백인에 비해 지능이 낮고 폭력적이고, 게으르고 청결하지 않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다 못해 이제는 흑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차별로 인해 좋은 직업, 사회적인 높은 지위(교수, 법률가, 의사, 금융 등)는 대부분 백인이 차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제는 이것이 마치 사실이었다고 생각하기가 더욱 쉬워졌다.



그렇게 백인은 더욱더 부자가, 흑인은 더욱더 빈지가 되었고 이것은 끊임없이 대물림되었다. 돈뿐만 아니라 교육에서도 평등하지 못하니 이러한 차별의 악순환은 해결되기가 쉽지 않았다.







차별이 왜 생겼을까? 아마도 인류 문명은 규모의 발전을 위해서 수많은 인력과 노동을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 차별을 활용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억압과 착취 등 끔찍한 일이 발생하게 되었고 더 이상 차별은 필요하지도, 용납할 수도 없다.



인류는 더 이상 노동 생산성을 위해서 인간을 차별로 통제할 필요가 없다.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 로봇 등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앞으로 인류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생산성을 갖추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는 과거의 모습을 탈피하고 새롭게 진화해야 한다.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협력하여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해야 한다.



차별은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나는 인류가 올바른 이성과 감성을 갖출 수 있는 교육을 받는다면 차별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을 통해서 기른 사고력은 세상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진실된 것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타인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 또한 교육을 통해서 갖춤으로써 우리 모두가 함께할 때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러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현대 사회에도 차별이 존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라는 인식으로 인해 대부분이 많은 돈을 소유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간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물건을 소유하며 우월감을 느끼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남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른다.



이러한 특성은 부모에게서 아이로 전달되며 그 결과 초등학생 때부터 차별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가령 월거지/전거지(월세/전세 사는 거지), 엘사(임대 아파트 사는 사람), 이백충/삼백충(부모 월급이 200~300만 원 이하인 사람을 벌레 취급하는 것), 장래 희망 건물 주와 같은 비 이성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결국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며, 무엇이 올바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것, 또 타인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함으로써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올바른 이성과 감성을 갖출 수 있는 교육을 통해서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한다면 차별에 대한 문제가 조금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이전 03화 언어 능력이 핵심이 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