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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림 Sep 02. 2023

식칼

 

 언 소고기를 썰다가 식칼의 날이 부러졌다. 고기에 박힌 칼 조각을 간신히 꺼내 보았다. 은빛 스테인리스는 핏물에 젖어 흉물스럽다. 하마터면 내 살점도 날아갈 뻔했다.


 


임신하고 큰아이를 낳기까지 매우 힘들었다. 그때는 내가 심장병이 있는지 몰랐다. 병원 측도, 임산부인 나도 검사를 소홀히 했다. 16시간 30분 진통 끝에 가까스로 자연분만에는 성공했지만 혈관은 다 터지고 체력은 바닥났다.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눈 뜰힘조차 없었다. 힘겹게 입을 열어 물었다. “아기는 아기는...건강한가요?” “네~ 아주 건강합니다. 공주님 이예요. 축하합니다.” 감격과 감동에 눈물이 차올랐다.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며 엄마의 도움을 받았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비보가 들려왔다. 외할아버지가 욕실에서 미끄러져 돌아가셨다. 갑작스런 소식에 부모님은 병원으로 뛰어갔다. 나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내 몸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할아버지와의 즐거웠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내게 아기를 선물로 주고는 하늘나라로 조용히 떠나셨다.



엄마는 도우미 아주머니룰 구해 나를 부탁했다. 그날은 할아버지의 삼우제가 있던 날이었다. 부모님은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아주머니께서 방으로 들어와 내게 물었다 “애기엄마 뭐 필요한 거 없어요?” 난 누운 채로 “네 없어요, 괜찮아요” 했다. 5분 정도 지나서 아주머니가 또 방에 들어왔다. 나는 무슨 일인가 했다. 아주머니는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복면을 쓴 남자가 아주머니 등에 식칼을 들이대고는 방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순간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했다. 남자는 내게 위협하며 꿇어앉으라고 했다. 전화기 줄을 끊어 뒤로 손목, 발목을 묶고는 옆에 있던 천기저귀로 내 눈을 칭칭 감았다. 아주머니에게도 똑같이 하는 것 같았다. 아기가 문제였다. 울면 운다고 어떻게 할 거 같고, 안 울면 어떻게 해버렸을까 불안하고 답답했다. 방금 전까지도 입을 쫑긋거리며 배냇짓하던 아이였다. 나의 젖을 힘껏 빨아 당기며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주었던 나의 살점. 나의 분신. 이 아이의 생사는 남자의 손에 들린 식칼에 달렸다. 살아야했다. 살아 내야했다.


남자는 내 목에 칼을 들이대며 돈 내놓으라고 했다. 생각나는 대로 패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성에 안 찼는지 아주머니를 방에서 끌고 나갔다. 2층 아래층을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인지 또 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당탕 시끄러웠다. 느낌상 이 방 안에는 아기와 나 둘뿐이다. 시간이 지체된다면 다 죽을 수도 있다. 어떻게 서든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예전부터 평창동에 도둑이 많다는 소문이 있었다. CCTV나 세콤 같은 무인 경비가 없을 때였다. 동네 주민들끼리 비상벨을 달자고 모의했다. 그게 불과 몇 달 전 일이었다. 리모컨을 누르면 동네에 사이렌이 울리고 경찰차가 출동한다. 주민들의 실수로 여러 번 소동이 있었다고 엄마한테 들었다.


나는 리모컨을 떠올렸다. 그 길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할아버지~ 제발요’ 매달렸다. 엄마가 자주 사용하던 곳에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후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뒤로 묶인 손목의 줄이 풀어졌다. 눈에 가린 천을 벗기고 발목도 풀었다. 그리고 뛰어가 문갑 위에 있는 리모컨을 힘차게 눌렀다. ‘삐오삐오삐오삐오’ 동네가 시끄러웠다.


 


옆집 할머니가 손주를 업고는 열린 대문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벨이 울리자 재빨리 대문으로 도주 한 것 같다. “무슨 일이니?”할머니는 실수로 또 벨이 울렸다고 생각했는지 느긋했다. 난 창문을 열어 “강도야 강도야” 소리쳤다. 할머니는 혼비백산이 되어 밖으로 뛰어나갔고 곧 경찰들이 왔다. 도우미 아주머니는 부들부들 떨며 흐느껴 울기만 했다. 경찰의 물음에 나는 또박또박 차근차근 경위를 설명하였다. 우는 아기에게 젖도 물렸다. 그제야 아기가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기는 건강하고 평온했다. 안심이 되었다. 경찰은 내게 어쩌면 이렇게 침착하고 차분할 수 있냐고 했다.


 


부모님은 이런 사정도 모르고 나의 안부를 물으러 전화를 했다. 난 대수롭지 않게 “큰일은 아니고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걱정할 건 없어요.”라고 부모를 안심시켰다. 남편에게도 전화했다. 아기를 찍겠다고 처갓집에 두었던 카메라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당신 아끼는 카메라 도둑맞았는데 할 수 없지 뭐 또 사면되지”정도로 가볍게 이야기했다. 경찰들도 가고 아주머니도 귀가하고 옆집 할머니, 할아버지도 곁에 있어 주다가 집에 가겠다고 했다. 순간 난 할아버지께 사정했다. “제발 가지 말아주세요 저 무서워요”


 


그날의 사건은 곱씹어 생각해도 의문이 남는다. 옆집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도우미 아주머니가 성폭행 당했다고 말했단다. 강도가 아주머니를 방에서 데리고 나갔을 때 그때였을까? 그렇다면 나도 곧 당할 순번이었겠지. 하지만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아주머니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새빨간 립스틱에 예쁘게 차려입고는 일하러 왔다. 의심이 들었다. 공범이 아닐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피해자다. 함부로 속단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주머니를 보면 그 때 일이 자꾸 생각나서 힘들었다. 엄마한테 부탁해 소정의 위로금을 건네주고는 그만 오시라고 했다.


 


오랫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누군가 가까이 지나가도 깜짝깜짝 잘 놀란다. 한동안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생각날 때마다 환기를 시키며 나를 위로하며 다독여 준다. 그 때 그 일은 별게 아닌 게 아니라 큰일이었고 나는 몹시 무서웠고 두려웠고 겁이 났다. 라고 직면한다. 그러면서 천만다행이라고도 말해준다. 나의 신이 지켜주었고 아기가 버텨주었고 외할아버지가 도와주셨으니까 살 수 있었다고, 감사드린다.


 


언 소고기를 썰다가 식칼의 날이 부러졌다. 고기에 박힌 칼 조각을 간신히 꺼내 보았다. 은빛 스테인리스는 핏물에 젖어 흉물스럽다. 저녁에 귀가한 남편과 딸들에게 방정맞고,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며 말하였다. 하마터면 고기 썰다가 엄마 죽을 뻔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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