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면 언제나 창문에 비친 햇빛이 방안 구석구석으로 기어들었다. 창가의 커튼 틈새로 새어 나오는 가늘고 날카로운 빛줄기는 마치 손끝에 베일 듯이 선명했다. 눈을 뜨면 언제나 그 자리였다. 빛줄기는 시간을 모르고 영원처럼 머물러 있었고, 나는 그 빛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희미하게 밤새 남겨진 기억을 더듬었다.
나는 바닷가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늘 짙은 소금 냄새를 풍겼고, 그 냄새는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걸쳐져 있었다. 바닷물은 투명했지만 그 아래는 어두웠다. 어쩌면 세상도 그랬는지 모르겠다. 투명한 껍데기 아래,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때로 나는 내가 그 물아래 숨겨진 어둠처럼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걸 바라보았다. 빛 아래 조용히 웅크린 어둠, 투명하지만 끝없이 깊어 도저히 바닥에 닿을 수 없는 어둠.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어느 날 밤, 갑자기 물음이 떠올랐다.
어린 나의 머릿속을 떠돌던 물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답을 몰라서였을까.
어쩌면,
답을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릴까
두려워서였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은 더 불투명해졌고, 나의 몸속에서 무언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파도가 모래를 삼키고 다시 뱉어내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 반복되는 행위는 생명의 근원과 닮아 있었다. 파도가 다가오면 손바닥을 펴고 기다렸다가, 다시 멀어지면 아무것도 잡히지 않은 허전함에 손을 움켜쥐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존재도 어쩌면 그런 것일지 모른다. 잡으려 하면 사라지고, 포기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듯 다시 다가온다.
어떤 날에는 존재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빗물이 천천히 흘러내리는 오후, 길고 끝없는 오후에는 무언가 묵직한 돌 같은 것이 가슴 위를 누르고 있었다.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하지만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감정이었다.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것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애초에 내 것이었던 적이 있었다면, 어떻게 잃어버릴 수 있었을까.
나는 가끔, 이 모든 것이 실수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어야 했다.
아무것도 아닌 어둠, 아무것도 아닌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그것이 최초의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존재하려 했던 그 첫 번째 욕망,
아무것도 아니었던 텅 빈 어둠에서 벗어나려 했던 그 욕망이
바로 모든 고통의 근원이 아닐까.
책장에 꽂힌 시집을 꺼냈다.
책을 펼치자 페이지 위로 흐르는 글자가 눈앞에서 녹아내렸다.
글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나는 책을 덮고 창가로 걸어갔다.
밖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뭇잎들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저 나뭇잎들은 왜 존재했을까.
잠시 푸르렀다가, 그렇게 떨어져 사라지는 것이라면,
왜 존재해야만 했던 걸까.
존재하지 않았다면 잃어버릴 것도 없었을 텐데.
나는 손바닥을 펼쳤다. 빛이 그 위에 내려앉았다. 빛은 가벼웠다. 무게가 없는 것들만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거운 것들은 결국 땅으로 돌아가 사라지고 만다. 나는, 무거웠다. 너무 무거웠다.
그 순간, 오래전 아버지가 나를 안고 바다를 바라보던 장면이 기억났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수평선을 가리켰다.
“저곳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아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라졌다. 투명한 병실의 창을 통해, 아버지의 마지막 숨이 이 세상을 빠져나갔다. 아버지가 떠난 뒤, 나는 그 수수께끼를 품고 살아왔다.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저곳에 있을까.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질문 자체에 있었다. 질문을 품고 사는 것. 답을 찾지 못한 채 헤매고 또 헤매는 것.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고통을 몰랐을 테지만, 동시에 아름다움과도 무관했을 것이다. 이 아픈 세상 속에서,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선명히 빛나는 것들. 눈물 한 방울, 희미한 달빛 아래 흔들리는 들꽃, 그리고 우리를 영원처럼 감싸는 바람과 햇살 같은 것들.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닿지 못했을 아름다움이었다.
문득 빛이 바래고 어둠이 몰려오는 저녁이 찾아왔다. 나는 다시 물었다.
"정말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나는 답을 알 것 같았다. 존재는 실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름다운 실수였다. 아프기에 아름답고, 덧없기에 영원히 기억에 남는 그런 실수였다.
그렇게 나는 빛과 어둠 사이에 앉아, 고요히 세상의 숨을 들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고, 창밖에서 고양이가 울었다. 그것들은 모두 나와 함께 이곳에 있었다. 살아있었고, 아팠고, 아름다웠다. 존재는, 이토록 명백한 실수이면서도 기어이 이곳에 뿌리를 내린 채 흔들렸다.
어쩌면 우리는 이 실수를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픔 속에서 피어나는 희미한 빛처럼.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아프고 슬프고 아름다운 이곳에서,
우리는 끝없이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