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에 맡겨 써 내려간 말들엔 언제나 지나감에 대한 고요한 인식이 있었다.
모든 건 때가 되면 사라진다.
이 문장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에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수용과 놓아줌,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잔잔한 신뢰가 스며 있었다.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에 대한 깊은 믿음.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한지를... 나는 안다. 삶은 끊임없는 순환 속에 있다. 피고 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보내는 그 수많은 장면들 속에서 우리는 종종 어떤 것을 붙잡고 싶어 한다.
기억을, 사람을, 감정을, 어떤 형태를.
그러나 진실은 너무나 명확하다.
모든 것은 머무르지 않는다.
물컵을 식탁에 올려두고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물이 반쯤 증발해 사라졌다.
무심한 오후의 햇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잠깐 놓았던 시간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그렇게 일상의 소소한 장면 속에서도 '사라짐'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마음에 품었던 누군가의 말투, 오래된 티셔츠에 밴 냄새, 어릴 적 엄마가 밥 짓던 냄새도 언젠가 희미해진다. 처음엔 그것이 낯설고 서운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것들은, 제자리를 찾아 조용히 떠난 것뿐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한참을 울었던 밤,
그 감정이 영원할 것 같아 두려웠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고통의 물살도 결국 잦아들었음을 느낀다.
누군가를 원망했던 마음도, 끝없이 자책했던 말들도, 어느새 그 빛이 바래져 더 이상 내 삶을 삼키지 않는다. 매일 반복되는 출근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이름 모를 얼굴들도, 한 번쯤은 친해지고 싶었던 동료도, 결국엔 지나간다. 영원할 것 같았던 연애도,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불면의 밤도, 그렇게 스쳐갔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마시는 이 한 잔의 차가 얼마나 귀한지를 알아야 한다. 어쩌면 이 맛도, 이 향도,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한 아이가 내 손을 잡고 웃어준 그 순간, 그 작은 손의 온기는 시간이 지나면 자라난 손으로 바뀔 것이다. 같이 삶을 동행하는 반려견의 눈빛은 언제나 싱그러울 것 같겠지만 무색의 회색톤으로 흩어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사라짐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유효의 끝은 우리에게 더 많이 사랑하라고, 더 많이 느끼라고, 더 깊이 살아가라고 속삭이는 삶의 방식이다.
그렇기에 지금 나를 웃게 만드는 사람을, 지금 내 옆에 있는 존재를 마음 다해 바라보아야 한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것들이, 어느 날 문득 사라지는 걸 우리는 너무 많이 봐왔다. 마음이 갈라졌던 가족도, 마지막이라는 인사를 못한 친구도, 문득 다시 볼 수 없는 이가 되는 걸.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포옹을 더 따뜻하게 해야 하고,
오늘의 말들을 조금 더 진심으로 전해야 한다.
다 지나가버렸잖아. 슬프게...
이 말은 슬픔과 위로를 동시에 품은 말처럼 느껴진다.
사라짐을 아는 사람만이, 지금 이 순간을 진심으로 살아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사라짐을 ‘소멸’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너머에 있다. 우리에게 ‘사라짐’이란, 어떤 존재가 그 모양과 역할을 바꾸어 다시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사랑도, 슬픔도, 고통도, 심지어 나 자신이라고 믿었던 정체성조차도 ‘때가 되면' 그 고유한 형태를 풀고 다른 이름과 모습으로 순환해 간다. 그래서 우리가 진심으로 붙잡을 수 있는 건 소유하는 힘이 아니라, 그걸 흘려보낼 수 있는 용기다.
모든 게 사라질 것이기에.
모든 게 덧없고 영원하지 않기에.
언젠가 사라질 사랑이기에.
지금의 포옹은 더 깊고, 지금의 눈빛은 더 빛난다.
사라질 것을 안다는 건 모든 존재에 대한 가장 정직한 존중이고,
모든 관계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애틋함이다.
우리는 그걸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붙잡지 않으면서도 깊이 사랑할 수 있고,
그래서 보내면서도 고마워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슬픈 일이 아니라
삶과 존재에 대한 가장 성숙한 응시이다.
모든 건 때가 되면 사라질 것이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도.
지금 어깨에 얹힌 이 무게도.
지금 붙들고 있는 이 이야기들도.
모두 언젠가 저절로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
붙잡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지금 이 순간,
그 감정을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놓아주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