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무언가가 먹고 싶어진다.
조용한 방 안, 글을 멈춘 책상 앞에서, 나는 자꾸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는다.
방금 식사를 마쳤는데도, 입 안이 허전하고 목울대 근처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입술 안쪽에서 아주 작고 투명한 슬픔이 비어 있는 자리를 핥고 있는 듯한 기분.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초콜릿 한 조각, 과일 한 조각, 혹은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을 놓는다.
왜 먹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입 안으로 자꾸 무언가를 넣고 있는 나를 인지한다.
이것은 배고픔이 아니다. 이것은 감정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살아 있다는 감각을 확인하고 싶은 내면의 움직임이다.
뱃속은 채워졌지만, 가슴 안쪽 어딘가가 여전히 허기지다. 마치 오래된 나무의 속이 비어 있듯, 겉으론 단단해도 안쪽이 텅 빈 무늬를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예전에는 그것을 외로움이라 불렀다.
누군가와 연결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던 결핍. 내가 사랑받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강박,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 그 외로움은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한 아이처럼 내 안에서 통증을 만들었고, 나는 그 통증을 쇼핑으로, 달콤한 음식으로, 때로는 아무 감정 없는 만남으로 덮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감정을 '외로움'이라는 단어로 부르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외롭지 않다. 누구를 원하지도 않고, 누구로 인해 생겨나는 결핍도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시간들이 오히려 나를 더 평온하게 만든다.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은 마음보다, 나를 조용히 바라보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먹고 싶어진다.
그 감정은 한때 이름이 없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잃은 것도, 갖지 못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나의 일부처럼 존재하는 감정이다.
햇빛이 들지 않는 오후 세 시의 방처럼, 잎을 다 떨어뜨린 겨울나무처럼,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어떤 공기 같은 감정.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지만, 이제야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글을 쓸 때는 그 감정이 사라진다. 마치 숨이 통하고, 피가 돌고, 마음에 맑은 바람이 스치는 것 같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내 안의 여백을 메워준다. 나조차 몰랐던 감정들이 손끝을 타고 흘러나올 때,
나는 내 존재의 실루엣을 본다. 살아 있다는 느낌은 그렇게 찾아온다.
그러나 글을 멈추는 순간, 다시 고요해진 자리에서 작은 허기가 올라온다.
누군가는 그걸 외로움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감정을 ‘허기’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찾아오는 이 조용한 공허는, 생존 이후에 남겨진 감정의 여운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이 허기를 ‘생존의 여운’이라 부르기도 한다.
살아 있다는 건, 때때로 너무 조용하고, 너무 비어 있는 상태일 때가 많으니까.
우리는 자꾸만 강렬한 감정, 드라마 같은 사건, 누군가의 손길로 그걸 확인하려 든다.
하지만 진짜 존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에도 존재한다.
조용한 방 안, 누군가의 말도, 위로도, 음악도 없이.
그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존재가 유지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아주 다른 허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 허기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하는 감정이다.
억지로 눌러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이름을 불러주며 곁에 앉혀야 하는 감정이다.
나는 이제야 그 허기에게 말을 건다.
"너는 어디서 왔니? 언제부터 내 안에 있었니?"
그러면 허기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머물 뿐이다.
그것이 허기의 언어다.
이제는 억지로 나를 채우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감정을 느끼는 연습을 한다.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뭔가가 당길 때, 나는 내 마음에 묻는다.
"지금 너는 무얼 원하니? 정말로 음식이 필요하니? 아니면, 나의 손길? 나의 눈빛? 나의 한숨?"
그러면 마음은 가끔 고개를 돌리고, 가끔 고요히 눈을 감는다.
그 순간 나는 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존재의 포옹이라는 것을.
말없이 안아주는 것, 내 존재가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고 속삭여주는 것.
그게 바로 허기를 다정하게 품는 방식이다.
허기의 이름으로 피어난 감정들은 날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어떤 날은 달콤함으로, 어떤 날은 바삭한 소리로, 어떤 날은 뜨거운 국물처럼.
나는 그 감정들 하나하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건 나의 감정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내 안의 여백이 말라붙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그 여백을 조용히 어루만지며 살아간다.
이제, 허기의 이름으로 피어난 감정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나를 다그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식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감정들마저도 나의 글이 되어,
누군가의 마음속 허기를 조용히 쓰다듬을 수 있다면,
나는 그 따뜻함으로도 충분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은 자신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본능적인 갈망을 지닌 존재이다.
어쩌면 우리가 무언가를 먹고 싶어질 때,
그건 단순히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을 다시 확인하려는 무언의 시도인지도 모른다.
단지 맛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라도 어떤 '자극'을 통해 내 존재를 느끼고 싶기에.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 순간에도,
내가 나를 느끼고 싶어서.
그 허기는 그렇게, 아주 조용히 다가온다.
허기란, 자기 존재의 흔적을 다시 느끼고 싶어 하는 감정이다.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아도, 내가 나를 바라보고 싶은 순간에 피어나는 감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 속에서도,
‘내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내면의 속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