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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어른이 되어 그를 사랑해 본다

by 태연

아빠가 죽은 날을 돌아보며 언젠가 미소 지을 날이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슬픔의 크기는 수면 위로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슬픔을 잠재우던, 투명하지만 비치지 않던 물이 계속 메말라갔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무언가를 흘렸다. 말이 되지 않는 말들, 숨결이 되지 못한 숨들, 그리고 울음이 되지 못한 떨림들. 그것들은 나도 모르게 그의 흔적을 좇았고 그와 함께 찍었던 흐릿한 사진 한 장에서 끝끝내 다시는 닿을 수 없는 손의 온도를 찾았다. 그는 그저 떠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의 모든 의미를 하나씩 조용히 꺼내 들고 간 사람처럼 느껴졌다. 말없이 사라졌지만, 그의 침묵은 내 안에서 폭풍처럼 모든 계절을 휘몰아쳤다. 햇빛 아래서도 그림자처럼 그가 따라왔다. 낡은 우산 속에 남은 그의 비 냄새, 숲길에 남은 발자국 같은 체취, 아무 말 없이 내 곁을 걷던 그 시간들이 마치 끝나지 않은 이야기처럼 가슴속에서 다시 시작되곤 했다. 어떤 날은 그의 호흡 소리가 내 숨결 속에서 이어지는 듯했고, 어떤 날은 그의 기침 한 번에 세상이 모래알처럼 부서지는 것 같았다. 지금의 나는 그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말한다.


'슬픔은 밀물처럼 온다. 그러니까 기다려라. 그다음엔 반드시 썰물이 오니까.'


썰물은 정말 올까. 나는 아직 밀물 속에 있다. 그래도 나는 이 바다를 떠나지 않는다. 그가 남긴 바다를. 슬픔을 견디는 일은, 가끔씩 그를 원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왜 그렇게 쉽게 떠났는지, 왜 나를 남겨두었는지, 왜 병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조금씩 태워가며 나를 무너뜨렸는지...

하지만 그런 질문 끝에 남은 것은, 그를 잃은 내가 아니라 그를 사랑한 나였다.




그를 그리워하는 것은, 이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되었다. 그가 사라진 이 세상에서, 나는 그가 남긴 시간과 마음의 온기를 수집하며 다시 살아가고 있다. 그가 남긴 바람, 그가 남긴 웃음, 그가 남긴 고요한 오후의 빛, 그 모든 것들을 나는 오늘도 조용히 껴안는다. 그는 나를 꾸짖는 대신, 늘 조용히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말보다 오래 남는 것이 있다는 걸, 그는 침묵으로 가르쳤다. 그는 손등으로 내 얼굴을 쓸어내리는 사람이었다. 내 얼굴에 스크래치가 날까 봐, 거칠지 않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게 다뤄져야 할 존재인 것처럼. 그런 그와 나는, 모두가 떠난 자리에 남아 긴 시간을 함께 견뎠다.

작은 집이었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마치 두 개의 별처럼 공존했다. 서로를 돕고, 부딪치고, 때론 침묵했고, 그 사이에 말 없는 사랑이 쌓였다. 그는 나의 친구였고, 형제였고, 무언의 울타리였다. 나는 몰랐다. 그가 내 전부였다는 걸. 그가 떠난 날, 나는 처음으로 내가 고아가 되었음을 알았다.


나는 여전히 그의 딸로 살아간다. 그의 숨결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그의 슬픔을 사랑으로 바꾸려는 사람으로. 언젠가, 정말 언젠가... 그의 부재가 나의 무게를 덜어주는 날이 올까. 그의 죽음을 기억하면서도,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나설 수 있을까. 슬픔은 깊은 강처럼 내 안에 흐르고 있지만, 나는 그 강을 건너는 법을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나는 그가 남긴 따뜻한 말들로 자신을 감싸는 법을 배운다. 그는 말없이 나를 끝까지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시간은 나에게서 그를 지우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사라진 자리마다 그의 존재감은 더 진하게 번져갔다.

나는 점점 더 그를 알게 된다. 죽은 그를, 죽은 후에 그를, 죽은 후에야 그를.

그는 흔히 말하는 ‘좋은 아빠’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사랑은 조용했고, 치열했고, 서툴렀지만 진심이었다. 나는 이제야 안다. 그의 웃음 속에 감추었던 외로움, 그의 고요한 눈동자 속에 담겨 있던 끝없는 사랑과 체념 그리고 그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지.




나는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 이 현실은 나에게 아빠가 죽은 꿈 속에서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를 잊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이 없었던 일처럼 느껴지는 방식으로 나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 속에 닿는 공기, 창밖의 나뭇잎,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도 마치 꿈속에서 흘러가는 장면 같다. 그가 없는 세상은 실제가 아닌 것처럼, 내가 아직 그의 죽음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의 부재는 일어나지 않은 일로 느껴진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그의 죽음을 현실에서 삭제한 것처럼 만들었을 뿐이다.


나는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사람들과 웃기도 한다. 그런데 문득, 아무 이유 없이 어떤 냄새, 어떤 색감, 어떤 풍경 하나가 그를 데려온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죽음을 새삼 맞이한다. 그리고 그 앞에서 나는 다시, 아니 처음보다 더 깊이 무너진다.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매일매일 다시 도착하는 파도와 같다. 다만 나는 조금 더 조용히 그 파도 앞에 앉아 있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의 부재가 더 깊게 스며들 때마다, 나는 더 단단해지고 있다는 걸. 슬픔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나는 사랑을 배우고 있다는 걸.


아빠가 아플 때 대신 아파주고 싶었다. 그의 고통을 대신 가져가고 싶었다는 마음이 먼저였다. 마치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그의 고통이 내 것이면 좋겠다고, 그가 무너지지 않게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떠났을 때, 마치 자식을 잃은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자식을 낳아본 적도 없고, 잃어본 적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일부를 잃은 것처럼 끝내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를 끝내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를 질식시켰다. 그의 죽음은, 부모를 잃은 고통인 동시에, 아이를 잃은 슬픔 같기도 했다. 사랑이란 때때로 역할을 넘어 그저 영혼이 영혼을 껴안는 일이라는 걸 나는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 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를 보호하고 싶었던 작은 어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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