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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우주 Oct 03. 2024

하루하루가 새로운 모험, 미지의 세계 탐험을 시작하자

미지의 세계의 탐험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하루하루가 새로운 모험,

미지의 세계 탐험을 우리들은 지금 이 순간,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하고 있다.

기억하지 못하는 초현실적인 모험을 매일밤 꿈속에서 하고 있으며 이에 잠식되었다가도 아침에 눈을 뜨면 여기로(현실로) 돌아와 새로운 모험을 또다시 시작한다. 오감을 완전히 생생하게 느끼며 눈에 선명한 영상이 그려지는 바로 인생모험을 말이다.


하지만 자신을 알지 못하고 삶에 반응만 하는 캐릭터로 살아가는 이들은 일상을 지겹다고 말한다. 삶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놓친 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자신이 만든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억척스럽게 그리고 매우 진지하게 무의미한 경쟁으로 언제나 고통 속에서 삶에 찌들어 살아가고 있다. 이가 인생이라 소리치며!

이 세상은 꽉 막힌 현실이 아니다. 동화책 속에 나오는 환상의 꿈의 나라이다.

타인과의 경쟁 체제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죽음과 직결되는 생존게임의 실제상황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현재 자신의 신념대로 펼쳐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믿음체계가 현실로 나타난 것일 뿐인데 이러한 우주법칙을 알지 못한 채 작은 두 눈동자에만 의지한 채 말이다.


이젠 낮은 물질적 족쇄로부터 주입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난 사고를 해야 할 때이다. 이 우주 속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때이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폐쇄적인 집단의식에 동참하여 스스로가 세워놓은 수많은 장벽들로 가려진 나의 꿈의 모험을 우주적 관점의 변화로 허물며 나아갈 때이다. 말도 안 된다고 여겨졌던 모든 일들이 믿음의 신념으로 모두 가능케  것이므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기적 같은 일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의 집단의식이 지배하는 세상에 가스라이팅 되어 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인정욕구에 취해 끝없이 타인에게 집단에게 인정받으려 애쓰고 인정받지 못하면 자신의 가치를 폄하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자신이라 여기면서 말이다.  

탐험과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영적본능이 생존본능에 의해 좌초되었고 물질적인 안정감만을 추구하며 쌓아 올린 돈과 지위를 울타리 삼아 이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남들보다 높이 올라간 것에 대한 우월감에 도취되었다. 진정한 마음의 안정감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는 무기력을 야기시켰고 4차원의 구조적 지구가 전부라 여기는 우물 안 개구리의 논리하에 이뤄진 이성적인 판단만이 무조건 옳다는 믿음은 진정한 자신과의 연결을 끊고 자신만의 길이 있다는 희망의 불씨조차 가볍게 꺼버렸다.


국어사전의 등재된 뜻과 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이라는 모험은 나를 자신이라 한계 짓는 이성적인 논리로는 바보 같은 행동이며 물질의 우위만이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집단의식의 논리에선 그에 상응하는 크나큰 보상의 조건이 뒤받쳐주어야만 실행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하기에 비현실적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행동들 역시 그 결과의 진위여부를 알 수 없기에 이는 곧 생존을 위협하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 여겨지며 막힌 시야를 가진 이들에 의해서 용기 없는 이들에 의해서 무시당해 왔다. 그러하기에 오직 깨어난(나와 연결된) 자들만이 믿음보다 더 큰 앎으로 무한히 펼쳐져 있는 창조의 길, 즉 모험의 길을 향해갈 수 있었고 장애물로 여겨지는 타인들의 비난은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스스로에게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했다. 


확실한 증거와 물증 없이 내 안의 가슴을 따르는 일은 참으로 비이성적인 대책 없는 자들이 하는 짓이라 세상은 말한다. 그래서 모험을 두려워하고 용기 내지 못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에 우리들은 굉장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존본능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예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엔 매우 비판적이고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긴요한 일일수록 생존본능에 따른 저항력 또한 매우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결국엔 나를 믿는 용기이다. 내면의 영이 말하는 직감의 느낌에 따라 걸어가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짐으로써 이 길의 문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나의 존재의 실체를, 깨달음과 삶에 대한 그리고 나에 대한 앎은 확신의 믿음으로 가슴의 진동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할 것이다. 나를 찾는다는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저 사회가 보여주는 작은 창만이 전부라 여기며 사방이 둘러싸인 틀 안에서 꼭두각시로 머물게  것이다. 그 사회는 이기적인 욕망만을 채우려는 이타심을 거부한 거짓자아가 만들어놓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진짜 나로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 채 스스로 참나와의(자신과의) 연결을 끊고 내가 아닌 것들을 나로 오인하고 있다. 가슴은 계속 진실의 목소리를 들려주지만 이는 논리적인 증거들을 채워주지 못하기에 지속적으로 무시해져 왔다.  

남들과 나를 비교한다면, 타인을 무시하고 타인을 질투한다면 그리고 이 또한 내가 하는 생각이라 여긴다면 당신은 지금껏 거짓자아가 부리는 거짓놀이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거짓자아를 당신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즉 진짜자신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모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내 안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가슴 벅찬 에너지와 새로운 것에 대한 희망찬 열망을 느낄 수 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설렘과 두려움이 동반되는 기분 좋은 가슴떨림, 두려움과 즐거움의 이원성이 공존함에 그로 얻게 되는 짜릿한 희열감, 인생은 이러한 모험이다.

신이 우리에게 새로운 것에 대해, 모르는 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강한 탐구 정신과 호기심은 그러한 두려움의 장벽을 뛰어넘으라고 선사한 것이다. 이를 사용함에 인생을 자신의 영혼과 하나 되어 탐험하라고 주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하늘을 나는 꿈조차 꾸지 못하는 어른들의 한정된 생각에 자신을 가두는 비건설적인 창조행위는 그만두고, 호기심의 눈으로 세상을 기쁨으로 바라보던 어린아이의 눈빛을 재장착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마음 가는 대로 그저 하고 싶었던 것을 자신 있게 자신에게 말하며 나만의 모험을 시작하자.  


희미해져 가는 자신의 감을 되찾아야 한다.

잡음에 뒤섞여버린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아야 한다.

그로 나는 나로 나아감에 나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 생에서 하려던 나를 위한 나만을 위해 마련된 삶의 모험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는 나이에 제한되지 않는 다. 이는 어느 상황에도 제한되지 않는 다. 지금 이 순간 가슴이 명료한 느낌으로 말해준다면 지금이 바로 완벽한 타이밍이라는 신호이다.

이 세상엔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 다. 모든 것은 완벽하며 완전하게 흘러간다. 그러므로 우주가 보내는 동시성의 신호를 무시하지 말고 용기 내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가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나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한다면

내 참모습을 드러내는 모험을 한다면

나도 그래요라고 말해주는 지원군들로 둘러싸이게 될 거예요.

by 셰릴 스트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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