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떠나왔던 '조제'들

대안 4 : 반성은 하되 후회는 하지 말라

by 블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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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0여 년이 흘렀나.

한 달에 한번 중증 장애아들이 함께 사는 곳을 방문해서 빨래를 도와주고 함께 놀며 제리뽀를 나눠먹던 기억이 새롭다. 놀던 아이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방구석에 기대고 있던 여자아이의 차분한 말 한마디에 질서가 잡혔다.


“너희들 싸우면 안 돼!”


작은 체구에 얼굴이 무척 예쁜 여자아이. 듣자니 뇌성마비라던데. 정신지체아들이 많아서 다들 지능이 낮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그 소녀는 늘 그렇게 방구석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책에 파묻힌 조제를 본 순간 난 그 여자애를 떠올렸다.


'그 아이도 이젠 어엿한 숙녀일 테고, 넓은 세상을 함께 누비고 싶은 남자친구를 그리워할 테지.'


영화 속의 조제는 언제나 ‘쿵’ 소리가 나도록 몸을 던지곤 했는데 그 소리는 갇힌 자만이 낼 수 있는, 세상을 향한 외로운 두드림이었다. 그 절절한 소리가 낸 파동은 평범한 대학생에게 전해졌다. 단조롭기만 한 삶 속에서 더 이상 경이로울 것 없던 청년 츠네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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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유모차에 누운 채 박명(薄明)으로 연명하던 조제에게 츠네오는 확 트인 바다를 선물한다.

감격에 찬 조제의 표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은 유통기한이 지난 사랑의 허망함을 담백하게 그렸다. 그 담백함 때문에 진통이 오래가는 모양이다.

내가 다니던 장애인시설엔 세탁기가 없었다. 자원봉사자들의 힘겨운 손빨래를 보면서 훗날 꼭 세탁기를 기증하리라 맘먹었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아직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솔직히 약속 자체를 잊어버렸다.

공수표가 되어 버린 사랑과 우정의 서약. 포기각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나눔과 섬김의 서약.

먼지가 두텁게 쌓인 '기억'의 앨범을 열어보기가 난 두렵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내가 떠나왔던 ‘조제’들과 마주칠 때 츠네오처럼 통곡하게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게 나쁘진 않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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