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피 May 27. 2024

마법처럼 나타난 돌부리들


내 삶은 그다지 유별날 게 없었다. 지독한 어려움을 겪지도, 그렇다고 대단히 화려할 것도 없는 평범한 소시민의 고단하고 소박한 삶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거다. 물론, 살면서 자잘한 돌부리들은 수도 없이 만났다. 학창 시절 공부문제, 친구문제, 집안형편문제부터… 대학 진학 이후에는 경제적인 문제들을 포함한 진로 문제, 사회진출 후에는 직장 상사/동료, 각종 업무적인 문제들, 연애문제까지 보통의 사람들이 시기에 맞춰 겪는 문제들을 비슷하게 겪어왔다. 그럼에도 성격상 욕심이나 야망이 크지 않아, 기대했던 것보다 결과가 미약하더라도 ‘이 정도면 됐지 뭐’하고 낙관적으로 지나거나, ‘이거 아니면 저거 하면 되지’ 하며 대안을 쉽게 찾았다. 그리하여 평범하디 평범하게 30대 중반까지의 삶을 지나왔는데…


그즈음 뜬금없이 커다란 돌부리들이 위성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쿵-’ 하고 먼저 떨어진 것은, ‘커리어’였다. 어릴 적부터 평생 일하는 커리어우먼을 꿈꿔왔다. 좋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며, 그래서 승진을 거듭하다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서야 은퇴하여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삶. IMF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우리 집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안정된 삶’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나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다. 나는 새롭고 재밌는 걸 찾아다니는 데서 에너지를 얻었고, 그러면서 동시에 불확실한 미래를 불안해했다. 나중에 심리상담 과정에서 많이 쓰이는 TCI 성격검사를 해보았더니 ‘자극추구-위험회피’ 기질이 동시에 높았다. 액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고 있는 격이라고 했다. 새롭고 흥미를 끄는 것들, 자극적인 것들을 찾는 동시에 위험을 회피하고 안전을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기질적인 특성대로, 새로운 미래가 상상되는 신사업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거기에 푹 빠져 1-2년을 보내고 나면 여지없이 번아웃에 시달렸다. 그래서 잠시 쉬다 또다시 새로운 곳으로 눈길을 돌렸고, 그 일에 빠져 지내다 또 번아웃을 겪고…몇 번을 그렇게 반복하자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더라. 템포 조절을 하지 못하고 남들은 4-5년에 걸쳐 쏟아부을 에너지를 1-2년 만에 다 쏟아버리고 나서 번아웃에 빠져버리면 제대로 된 성과도 얻지 못했다. 푹 빠져서 모든 것을 불태웠는데 나는 지쳐 쓰러지고, 내가 얻을 수 있는 걸 제대로 얻지 못했다는 상실감과 허망함, 억울함까지…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또래보다 빠르게 성장했지만, 어느 순간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올라가야 할 계단은 있었지만, 저 계단 끝에 있을 무엇에 대한 기대감이 허물어졌다. 더는 올라갈 기운도 없고, 올라가기도 싫은데, 내려가기도 아깝고… 그렇게 몇 년을 보냈다.


그 사이 지금의 남편을 만나 생각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고, 내려놓기로 했다. 매몰비용이 아깝다고 앞으로 남은 더 긴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지만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당장에 끊길 현금흐름과, 그동안 쌓아온 물욕과 커리어, 여전히 잘 나가는 것 같은 친구들과의 비교까지… 새롭게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는 초심자의 자세와 마음으로, 초심자의 위치에서 해야 했는데 그것도 어렵게만 느껴졌다. 매 순간 허탈함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해보자 하고 간신시 이어가고 있던 중에…


‘쿠궁-’ 하고 두 번째 거대한 돌부리가 나타났다. 난임이었다. 원인도 알 수 없었다. ‘멋지게 은퇴까지 일하는 커리어우먼’이라는 로망과 동시에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귀여운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리스트에 있었던 것 같다. 돌아보니 좀 촌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참 평범한 꿈이었다 싶기도 한데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여하튼… 나이는 들어가는데, 원인불명의 난임으로 병원치료를 거듭했다. 원인불명 난임의 원인에는 노화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에, 한편으로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매월 반복되는 호르몬치료는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내 기분과 성격까지 바꿔버리는 것 같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웬만해서는 긍정적으로, 낙관적으로 대안을 찾아 움직이는 것에 익숙했는데 그 시기에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우울증에 걸리면 그 어떤 말이나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듣기는 했지만 사실상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아, 이런 기분이, 상태가 되는 거구나. 하루종일 어두운 방 안에서 침대에만 누워있으면 온몸이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멍하니 누워있다 보면 하루가 갔다.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모든 세상이 폐허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난임과, 그로 인해 멈추어 버려야만 했던 내 삶. 성격이 팔자라고, 이것도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불확실하고 지속적인 비용과 수고를 필요로 하는 난임치료를 언제까지고 지속하기보다는, 내가 정한 기간 안에 할 수 있는 한 노력해 보고 안 되면 포기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지나고 보아도 그 결정이 옳았는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연이어 내 삶에 떨어진 거대한 돌부리 두 개가, 내가 바라왔던 미래를 한 순간에 부숴버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을 기대하면서, 어떤 것을 바라며 살아야 할까… 도무지 모르겠다 싶었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문제 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그저 동아줄이라도 잡고자 발버둥 치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큰 힘이 되어주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무력하고 무능력한 나 자산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커져갔다. 나는 망가지기 싫은데, 갑작스레 만난 거대한 돌부리 앞에서 자꾸만 망가져가고 있었다.


그나마 그 과정을 더디게, 완화시킬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던 것이 명상이었다. 불안과 우울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몰려올 때 가만히 호흡에 집중하며 몇 분을 있다 보면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명상에 대해 공부하며 이해하게 되는 개념들이 위로가 됐다.. 그렇게 명상을 하고 나면 잠시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고, 책이라도 읽고, 취미생활이라도 할 수 있었다.


다양한 갈래로 명상이 발전해 왔기에, 현존하는 명상은 굉장히 다양하다. 그러나 그 뿌리는 하나인데, 부처의 말씀과 가르침이다. (참고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말하자면 나는 천주교다. 종교와 무관하게 명상을 공부하고 있고, 이야기할 것이다.) 방대한 진리를 담고 있는 내용의 시작은 ‘고통(팔라어 dukkhā)’과 ‘욕망 (Tanha)’으로부터 시작된다.


기원전 600년경 인도의 왕족으로 태어난 부처는, 호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나가 고행을 시작했고 그 고행의 끝에 얻은 진리를 ‘네 가지 고귀한 진리(The Four Noble Truths)’로 남겼는데 그 첫 번째가 고통(dukkhā), 두 번째가 욕망(Tanha)이다. 그렇다. 부처는 삶을 ‘고통의 바다’라고 이야기했고,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이라 했으며, 니체는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진리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런 현자들이 ‘삶은 고통’이라 말했다니, ‘대체 왜 내 삶에 이런 돌부리들이 와서 처박히는 거야’하던 중에도 ‘왜?’라는 질문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 자체가 위로이기도 했다.


나에게는 커리어와 임신이라는 영역에 돌부리가 나타났지만, 이 돌부리는 모든 사람에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는 건강으로, 소중한 것의 상실로, 돈으로, 관계로, 취업이나 시험으로, 사업의 성패로… 그 모든 돌부리들이 고통이라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는 것이 집착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고통’과 ‘욕망’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했다. 너무도 심오하고 방대한 지혜이기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매우 편협한 범위로 제한돼 있지만, 그만큼에 대해서만이라도 다음 편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