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애피타이저_한겨울 날의 레스토랑

by 심해해삼

1. 애피타이저(Appetizer)_한겨울 날의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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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벗어나자 아득한 눈보라가 시야를 휘감았다.


동우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폭설주의보가 내려졌다는 것은 아까 얼핏 라디오에서 들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 앞뒤 분간을 못할 정도로 내릴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흩날리는 눈은 시간이 갈수록 더 두꺼워졌다. 근처 표지판은 물론 도로의 구분선까지 눈으로 하얗게 뒤덮여 그 색과 형태를 잃은 지 오래였다. 그 때문인지 꼭 하얗고 거대한 괴물에 집어삼켜진 것 같은 실없는 상상마저 들었다.


그렇게 오로지 감각에 의지해 운전을 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몰아치던 눈보라 저 너머에서 자그마한 입간판 하나가 보였다. 반쯤 눈으로 뒤덮여 있긴 했지만, 후미에 쓰인 ‘레스토랑’이라는 단어는 또렷하게 그녀의 의식을 붙들었다.


이 근처에 레스토랑이 있었던가.


동우는 기억을 가만히 더듬다가 그냥 간판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차를 틀었다. 과연 저 간판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 어떤 레스토랑이 있는지 모르지만, 눈이 그칠 때까지만 잠시 쉬어갈 수 있다면 어디든 족했다. 안 그래도 아침을 거르고 나와 배고프던 참이었다.


입간판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야트막한 산 중턱에 세워진 레스토랑이 보였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2층 건물이었는데, 낡긴 했지만 벽에 새겨진 정교한 부조 탓인지 어딘가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꼭 작은 성 하나를 축소해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창 밖 너머로 불이 켜져 있는 걸 봐서는 영업 중인 모양이었다. 동우는 레스토랑 앞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멈춰 세웠다. 주차장에 차 몇 대가 세워져 있는 걸 보면 눈보라를 피해 여기에 온 것이 자신뿐이 아닌 듯했다.


차에서 내리자 본격적으로 무서운 추위가 동우의 몸을 휘감았다. 거기다 쏟아지는 눈 때문에 제대로 앞도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녀는 벌벌 떨면서 서둘러 레스토랑 문을 열었다. 곧 포근한 온기와 공기 중에 섞여 있는 음식 냄새가 자연스럽게 밀려와 얼어 있던 몸을 끌어안았다.


따뜻하다.


동우는 옅은 황홀감 속에서 홀로 이렇게 생각했다.


“안녕하십니까?”


웨이터로 보이는 깔끔한 인상의 남자가 그녀를 맞이했다.

동우는 그를 보자마자 순간 멈칫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디선가 만난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이 뒤따랐다. 언제였더라.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손님, 괜찮으신가요?”


그런 동우의 속내를 눈치 챈 것인지 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동우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누, 눈이 많이 와서 들어 왔는데요……”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꽝스러운 변명이었다. 그러자 남자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남자는 차분히 레스토랑 안 쪽을 가리켰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무언가 거역하기 힘든 무게가 있었다. 동우는 눈치를 보다가 얼떨결에 그의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레스토랑 내부는 생각보다 단출했다. 가운데에 커다란 식탁 탁자가 있고, 거기를 중심으로 손님들이 빙 둘러 앉아 있었다. 손님들의 나잇대나 성별은 각기 달랐는데,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공기가 주위에 흐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사장님, 손님이 또 오셨습니다.”


웨이터가 가볍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양복 차림의 신사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동우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그가 이 레스토랑의 사장인 모양이었다.


“어서 와서 앉으세요. 마침 딱 한 자리가 비었습니다.”


마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투였다. 동우는 난데없는 환대가 얼떨떨했지만, 눈치껏 대강 앞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가볍게 주위를 눈으로 쓸었다.


확실하다.

나는 여기에 온 적이 있다.


동우는 이 사실 하나를 한 번 더 되새김질했다. 아까 웨이터를 보자마자 느꼈지만, 여기에 있는 사장은 물론 레스토랑이라는 이 공간 자체도 어딘가 익숙했다. 분명 처음 오는 곳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여러 날 지낸 공간처럼 낯익었다.


어디일까.

고민하던 그녀의 의식은 이내 어느 지점에 멈추었다.

그곳이다.

잊을 레야 잊을 수 없는 곳.

지난 몇 개월의 시간을 집어 삼킨 장소.

여기는 그것과 닮았다.

비록 내부 모습은 다르지만, 흐르는 분위기가 소름끼칠 정도로 똑같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렇게 동우가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곁에 있던 사장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의 질문에 동우는 서둘러 도리질 쳤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허락을 구하는 사장의 말에 동우는 당황해서 물었다.


“뭘요?”

“만찬회요.”

“네?”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그러자 식탁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심드렁한 어조로 일렀다.


“운 좋은 줄 아쇼. 원래 오늘 어떤 부자가 여기서 만찬회를 열려고 했는데, 폭설 때문에 못 온다고 연락이 왔다네. 하지만 미리 만들어 놓은 음식을 버릴 수는 없으니, 레스토랑에 온 손님들한테 공짜로 주기로 했대.”


그 말을 들은 동우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사장을 올려다봤다.


“정말인가요?”


사장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몇날 며칠 공들여 만든 음식인데 이대로 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런다고 이걸 돈 받고 내드리기도 그렇고요. 그래서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오늘 오신 분들에게 그냥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적어도 그 말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동우는 그때서야 식탁에 앉은 사람들 사이에 돌고 있던 불편한 공기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이들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폭설에 발이 묶여 레스토랑에 온 사람들이었다. 당장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으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면 새로운 손님도 오셨으니, 한 번 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내 사장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늘 코스 요리는 애피타이저, 스프, 샐러드, 생선 요리, 셔벗, 메인 요리, 디저트, 커피 순으로 진행됩니다. 미리 준비 된 음식이라 메뉴 변경은 어려우며, 대신 오늘은 어떤 비용도 받지 않겠습니다. 그저 맛있게 드셔주시면 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웨이터가 음식이 담긴 접시를 가지고 왔다. 그는 능숙하게 식탁에 앉은 사람들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사장이 가볍게 설명을 덧붙였다.


“먼저, 애피타이저 입니다.”


처음으로 나온 것은 저민 연어가 얹어진 손바닥만 한 카나페였다. 사장은 나긋나긋한 어조로 애피타이저에 대해 설명했다.


“연어와 크림치즈로 만든 카나페입니다. 절인 올리브를 살짝 얹어 간을 맞췄죠. 부디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군요.”


그러면서 그는 어서 먹어보라며 은근한 압박을 줬다.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살피다가 하나 둘 카나페를 맛보기 시작했다. 동우 역시 다른 사람들이 먹기 시작한 걸 본 후에야 자신의 몫을 입에 털어 넣었다. 눅진한 연어 살 아래에 감춰진 짭조름한 맛이 혀의 감각을 가만히 일깨웠다. 이렇게 무언가를 씹고 있자니, 몸에 서린 한기가 하나 둘 가시고 있는 기분까지 뒤따랐다.


“혹시 박동우 작가님 아니세요?”


동우가 음식 맛에 골똘히 잠겨 있을 무렵,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요란한 차림의 여자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동우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여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맞죠? 저 작가님 팬이에요! 작가님이 쓰신 책은 전부 읽었어요!”

“고, 고마워요.”


동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했다. 설마 여기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라 미처 예상치 못했다.


“박동우 작가? 몇 달 전에 뉴스에 나왔던 그 작가 아니야? 갑자기 몇 달간 쥐도 모르게 사라져서 떠들썩했잖아.”


아까 동우에게 처음 말을 건넸던 중년 남자가 알은 채를 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노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나도 뉴스에서 본 적 있소. 문학상을 수상 받은 다음날 실종 되는 바람에 다들 난리였지.”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동우에게로 쏠렸다. 모두가 실종 건에 대해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요란한 차림의 여자가 너스레를 떨며 화재를 돌리려고 애썼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셨잖아요. 작가님께 말 못할 이유라도 있었겠죠.”


자기 때문에 동우가 불편해 하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중년 남자도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긴, 작가들은 종종 괴짜 같은 짓을 저지르니까.”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결 누그러졌다. 무어라 답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납득하는 것 같았다.

동우는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 가만히 안도했다. 실종 사건 이후, 온갖 질문과 관심에 지긋지긋하게 시달렸다. 눈보라를 피해 얼떨결에 들어 온 여기서마저 비슷한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저 작가들의 흔한 괴짜 짓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백번 나았다.


“그나저나 원래 여기서 열려던 만찬회는 무슨 만찬회였나요?”


동우를 알아 봤던 요란한 차림의 여자가 이번에는 사장을 향해 질문했다. 그러자 식탁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눈초리가 단숨에 사장에게 쏠렸다.

다들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은근히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기담 만찬회였습니다.”

“기……담이요?”


사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답하자 질문을 한 여자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사장이 옅은 미소와 함께 설명을 이었다.


“오늘 만찬회 주최자의 가족 전통이라더군요. 어렸을 적,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날이 되면 추워서 바깥에 나갈 수가 없으니, 가족들끼리 모여서 각자가 아는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하네요.”


사장이 창가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창 밖에는 여전히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창틀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어른이 된 후에도 그 추억을 잊지 못해 추운 겨울날이면 사람들을 모아 기담을 나누는 만찬회를 열곤 하셨답니다. 올해는 여기서 열 예정이었는데, 결국 눈 때문에 불발되고 준비한 음식은 여러분이 드시고 계시죠.”


겨울날 기담과 함께 하는 만찬회라.

거기까지 들은 동우의 머릿속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모닥불 앞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과연 무슨 기담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퍽 단란했을 법 싶었다.


“기담 만찬회라는 거, 우리가 그냥 하면 안 되나?”


아까 동우에게 말을 걸었던 중년 남자가 슬쩍 제안했다.

그 말을 들은 사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중년 남자는 헛기침을 한 뒤에 차분히 제안했다.


“누구나 각자 그럴 듯한 이야기 하나 쯤은 알고 있을 거 아냐. 이왕 이렇게 됐으니, 우리라도 대신 기담을 나누면서 만찬회를 즐기는 거야. 어때?”


한 마디로 원래 여기서 만찬회를 열려던 부자의 흉내를 내보자는 것이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노인도 흥미를 보였다.


“나쁠 것 없겠군. 안 그래도 그냥 만찬만 즐기기에는 심심하던 참이었는데.”


그렇게 앞서서 누군가 승낙을 하자, 식탁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곧 노인을 뒤따라 요란한 차림의 여자가 나서서 말했다.


“저도 좋아요, 찬성!”


뒤를 이어 곁에 앉아 있던 뿔테 안경을 눌러 쓴 다른 여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재밌겠네요. 저도 하죠.”


이어서 창백한 인상의 사내도 가볍게 승낙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어색하게 있을 바에는 차라리 그 편이 낫겠어요. 풀코스가 전부 나오는 데는 시간이 제법 걸리잖아요. 차라리 이야기라도 하고 있는 게 좋죠.”


그렇게 동우를 제외 한 모두는 단숨에 중년 남자의 기담 제안을 승낙했다. 이어서 중년 남자가 홀로 조용히 있던 동우를 힐끔 보며 질문을 던졌다.


“작가 양반은 어떻게 할 거요? 원래 이런 건 작가들 전문이잖아.”


모두의 시선이 한 번 더 동우에게 내리 꽂혔다.

도저히 못하겠다고 답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동우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도 참여 할게요.”


떠밀리듯 동우까지 제안을 승낙하자,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장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어찌됐든 결국 기담 만찬회가 열리긴 열리게 됐군요.”


그 말을 들은 중년 남자가 넌지시 물었다.


“혹시 그럼 안 되나?”


사장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요. 이렇게라도 기담 만찬회를 열어주신다면, 주최자 분도 기뻐하실 겁니다. 무엇보다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답니다. 추운 겨울 날, 맛있는 음식과 곁들여 나누는 기담만큼 각별한 것도 또 없죠.”


그러면서 그는 식탁에 앉아 있는 손님들을 향해 차분히 일렀다.


“애피타이저를 다 드셨으니, 수프를 내오겠습니다. 그 사이 첫 번째 기담을 준비해주시지요.”


말투는 정중했지만, 사장의 목소리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흥미와 호기심이 엿보였다. 분명 이 상황 자체를 반기고 있다. 동우는 직감적으로 이 사실 하나를 알아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장의 입가에는 전에 없던 흡족한 미소가 가득했다.


마치 처음부터 여기서 기담 만찬회가 열릴 것이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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