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수프_매월이 (1)

by 심해해삼

2. 수프(Soup)_매월이 (1)






“오늘 준비한 스프는 브로콜리 크림 스프입니다.”


모두의 앞에 스프 담긴 접시가 놓였다.


브로콜리로 만들었다는 말 그대로 스프는 밝은 연두색을 띄고 있었다. 동우는 홀린 듯이 스프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담았다. 그러자 푹 삶은 야채 특유의 포근한 단 맛과 식도를 기분 좋게 자극하는 걸쭉한 감각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다른 건 몰라도 오늘처럼 추운 날 먹기에는 제격이었다.


“감자 전분과 치즈를 살짝 넣어서 부드러움을 더했죠. 본격적으로 식사를 하기 전, 추위에 굳어 있던 위장을 자극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사장은 모두를 향해 스프에 대해 설명했다. 추운 날, 따뜻한 스프를 만나서 반가운 것은 동우뿐이 아닌지 모두 스프를 먹는 데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요란한 차림의 젊은 여자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라도 할까요? 이렇게 멀뚱멀뚱 보면서 음식만 먹는 건 심심하잖아요.”


그녀는 밝은 웃음과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이세라라고 해요. 작은 수제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죠. 제가 달고 있는 것들 모두 직접 만들었답니다.”


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액세서리가 특이하다 싶었는데, 모두 수제품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세라가 말문을 트자,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 있던 노인이 뒤를 이어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조민욱이라고 하오. 예전에는 무역 쪽에서 일했지만, 지금은 그냥 뒷방 늙은이로 살고 있지.”


그 다음은 아까 기담 만찬회를 제안했던 중년 남자 차례였다. 중년 남자는 입가에 묻은 스프를 닦으며 말했다.


“난 광열, 백광열이요. 여수에서 낚시 가게를 하고 있수다.”


그 다음으로 창백한 인상의 남자가 수줍게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는 김철헌이라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예요. 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차분한 어조로 자신을 소개했다.


“전 서현아예요. 천문학자랍니다. 연구도 하고, 대학에서 학생들도 가르치죠.”


그렇게 차례차례 소개가 끝나자, 모두의 시선이 다시 동우에게 향했다. 이제는 자신 차례였다. 동우는 쭈뼛거리다가 건성으로 답했다.


“저는 박동우라고 해요. 아까 알아보시는 분도 계셨지만 소설을 쓰고 있어요.”


갑작스러운 폭설에 발이 묶였다는 걸 빼고는 모두 공통점 하나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제각각인 사람이 여기 모였는지 조금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첫 번째 기담은 누가 이야기 하시겠습니까?”


한 차례 소개가 끝난 직후, 잠자코 있던 사장이 모두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민욱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내가 먼저 하지.”

“어르신이요?”


사장이 의외라는 투로 물었다. 설마 이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그가 먼저 나설 거라 생각 못한 모양이었다.


“원래 이런 건 나이 든 사람이 시범을 보여야하지 않겠나.”


민욱은 가볍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오늘 나는 잘 아는 미술품상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소. 내가 찾는 그림이 있는데, 비슷한 게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그러던 중에 폭설을 만나 여기 온 거요.”


그의 이야기에 흥미가 생긴 듯 사장이 재차 물었다.


“대체 무슨 그림입니까?”

“말하자면 길지.”


민욱은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내가 아직 10대 소년이었을 적에 겪은 일이오.”




* * * * *



난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어났소.


우리나라 조선은 태어나기도 전에 경술년 그날 영영 망해버렸다는 말만 어른들에게 들었지. 그때만 해도 난 아버지가 지어주신 조민욱이란 이름보다 츠기오란 일본 이름으로 더 자주 불려 졌소.


당시 우리 집안은 무척 가난했소. 작은 텃밭에서 채소를 길러 장에 내다 팔거나, 바닷가 근처에서 고기를 잡아 겨우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었지.


속없는 소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렸을 적의 나는 독립운동 같은 건 전혀 관심이 없었소. 오히려 정반대라면 정반대였지. 나라가 독립을 하든 말든 나 같은 무식한 가난뱅이들은 크게 뭐가 달라지기나 하겠느냐고 늘 생각하고 다녔었거든.


그런 내게 일본에서 온 부자들은 동경의 대상이었소.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나라. 내가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을 그들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오.


일본인들이 자가용을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날이면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어 하던 일을 전부 내팽겨 치고 달려가곤 했지.


친일파라고 욕해도 좋소. 아무튼 코흘리개 시절부터 어떻게든 일본인들의 눈에 들어 출세하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다오.


집도 가난하고 가진 것도 없던 내게 일본인은 진창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밧줄이나 다름없었소.


일본인들처럼 잘 살려면 일본인들이 쓰는 말을 익혀야 한다, 나는 처음에 이렇게 생각했소. 그래서 일본인들이 자주 오가는 시장 바닥을 기웃거리며 아득바득 일본어를 배웠지.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난 머리가 좋은 편이오. 얼마 안 있어서 나름 몇 마디 정도는 거리낌 없이 주고받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게 됐거든.


어느 날, 딱 봐도 귀부인인 것 같은 여자가 시장 골목에서 조선인인 가게 주인과 말이 통하지 않아 낭패를 보고 있는 걸 발견했소.


난 직감적으로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음을 알아챘지. 난 중간에 끼어들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소. 그러자 그 귀부인은 남편이 주문한 술을 가지러 왔는데, 조선인이 도통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난감하다고 하더군.


나는 곧바로 이 말을 통역해서 가게 주인에게 전달했다오. 그때서야 가게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큼지막한 항아리를 들고 왔지.


딱 봐도 혼자 들고 갈 정도의 크기가 아니었소. 난 여기서 기지를 발휘해 직접 들어다주겠다고 말했소. 안 그래도 이 술을 어떻게 들고 가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던 귀부인은 내 호의에 곧장 응했지.


귀부인을 따라 도착한 곳은 당시 시내에서 부자로 유명한 마쓰다 집안의 저택이었소. 으리으리한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그냥 바로 머리털이 바짝 서더군. 근처를 지나갈 때 담벼락 너머로 힐끗 힐끗 보긴 했지만 막상 들어와 본 적은 처음이었거든.


술 항아리를 들어주고 나자 귀부인이 고맙단 말과 함께 작은 수고비를 내밀었소. 난 그 돈을 받지 않고 살짝 딴청을 부렸지. 꼭 이 돈을 받으면 이대로 밖으로 나가 이 저택으로 영영 멀어져버릴 것 같았다오. 그런데 때 마침 저택의 주인인 마쓰다 어르신이 외출 갔다가 집안에 돌아온 거요.


귀부인은 마쓰다 어르신이 들어오자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했소. 나도 엉겁결에 따라 고개를 숙였지. 어르신은 나를 보면서 이놈은 누구냐고 묻더군. 그러자 귀부인은 시장에서 도움을 받은 이야기를 하며 나를 칭찬했소.


그러자 마쓰다 어르신은 나를 한참이고 바라보는 거요.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내가 시장에서 만난 귀부인은 마쓰다 어르신의 맏며느리이자 큰 도련님의 아내 되시는 나오미 마님이셨소.


마쓰다 어르신은 내게 저택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하셨소. 그 전에 일하던 일꾼은 일본어를 할 줄 몰라 답답해서 내좇아 버렸다나.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오. 난 그 자리에서 어르신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답했다오.


마쓰다 어르신은 그런 내게 심부름꾼 겸 창고지기 일을 맡기셨소. 사소한 일이었지만 나는 드디어 출세한 일본인에게 줄을 설 수 있단 생각에 눈물까지 났다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마쓰다 집안에서 일하기 시작했소.


새벽이면 누구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리나케 마쓰다 저택 곳곳을 기웃거리면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지. 물론 그러면서 받는 주급은 형편없었다오. 하지만 당시 나에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소. 그저 어떻게든 이 집안에서 편리한 존재가 되어 남아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나를 저택 사람들은 바보 츠기오라고 불렀소. 뭘 시켜도 헤헤 웃으면서 군소리 없이 해내고, 싫은 소리 들어도 얼굴 한 번 안 찡그렸으니까.


그만큼 난 필사적이었소. 바보라고 불려도 마냥 좋았소이다. 그때 나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힘 있는 일본인들의 발바닥이라도 핥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오. 다행이 나서서 고생을 자처한 끝에 저택 내에서도 나는 그럭저럭 인정받는 일꾼이 될 수 있었지.


저택의 주인인 마쓰다 어르신은 전형적인 졸부였소. 힘 있고 가진 사람 앞에서는 친근하게 굴고, 돈 없고 무식한 사람은 짐승처럼 보곤 했지.


그나마 나은 점은 자신에게 굽실 거리는 조선인들은 말 잘 듣는 개 취급 정도는 해줬다는 거요. 덕분에 나 같은 놈들이 몇몇 들러붙어 어찌 어찌 하루 벌어먹고는 살 수 있었지.


마쓰다 어르신에겐 두 아들이 있었소. 그 중 둘째 아들은 경성에 유학을 갔고, 첫째 아들인 준이치로 도련님과 같이 살고 있었지.


준이치로 도련님은 도쿄에서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지만, 아버지인 마쓰다 어르신을 쏙 빼닮아 툭하면 힘없는 하인들을 괴롭히곤 했소. 물론 주요 괴롭힘 대상은 나였다오. 갖은 핑계를 대면서 심심풀이 삼아 나를 두들겨 패곤 했소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 준이치로 도련님 덕분에 내가 마쓰다 집안에 오래 남아 있을 수 있었다는 거요. 보통 하인들은 준이치로 도련님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버리지만 나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으니 이만한 장난감도 또 없었지.


본인이 생각해도 평소보다 구타가 심했던 날은 지폐까지 쥐어주며 어디로 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날 붙잡을 정도였소. 내가 언젠가 한 번 실수를 저질렀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나서서 잘못을 덮어준 적도 있다오.


준이치로 도련님 이야기가 나왔으니, 나오미 마님 이야기를 빠질 수 없지. 시장에서 만난 귀부인, 나를 마쓰다 저택으로 안내해주신 그 분을 나는 아직도 은인이라고 생각하오. 그분은 남편이나 시아버지와 달리 매우 선량하고 친절하신 분이셨소. 조선인 하인들도 가족처럼 대해주셨지. 어떻게 그렇게 좋은 분이 못된 준이치로 도련님의 짝이 됐는지 모두가 의아하게 생각했을 정도였소.


나오미 마님은 특히 나를 아껴주셨소. 본국에 내 또래의 친정 남동생이 있다나. 그래서 일하다가 종종 과자나 용돈을 쥐어주시기도 했다오. 사실 마쓰오 저택에서 일하며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던 건 나오미 마님의 도움이 크오.


힘든 일도 많았지만, 나는 이를 악문 덕에 용하게도 마쓰다 저택에서 적응할 수 있었소. 물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어 실력도 늘었지. 처음에는 허드렛일만 맡아서 했지만 신임을 얻으면서 나름 크고 중요한 일들도 맡았소. 그렇게 나는 세 번의 겨울을 마쓰다 저택에서 보냈다오.


그러던 어느 날, 마쓰다 저택에 때 아닌 소란이 일었소. 경성에 공부하러 갔다는 마쓰다 어르신의 둘째 아들, 신지 도련님이 돌아오신 거요.



* * * * *



여기까지 말하고서, 민욱은 마른기침을 콜록거리며 토해냈다. 긴 이야기를 하는 게 제법 몸에 부친 모양이었다.


그러자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장이 그의 잔에 물을 채웠다.


“따뜻한 물입니다. 드시면서 말씀하시지요.”


민욱은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더니 급하게 몇 모금 마셨다. 그런 후에야 조금 진정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미안하게 됐소. 나이가 나이인 지라 이 모양인지라 길게 말하는 게 힘들군.”


그러면서 그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신지 도련님이 돌아오신 이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소. 신지 도련님이 경성에서 어떤 기생과 눈이 맞아 함께 왔다는 거요.”



* * * * *



공부하러 갔던 둘째 아들이 불쑥 돌아오자 마쓰다 집안은 발칵 뒤집혔소.


거기다 신지 도련님은 그냥 돌아온 게 아니라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고 갈 곳이 없어지자 어쩔 수 없이 돌아온 것이었지.


당연히 아버지인 마쓰다 어르신은 길길이 날뛰셨소.


신지 도련님이 막 돌아오신 며칠 동안은 어르신의 고함이 끊이질 않았을 정도였다오. 나 같은 하인들은 행여나 불똥이 튈까봐 그저 숨죽이는 수밖에 없었소.


솔직히 나는 신지 도련님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소. 나로서는 그냥 모셔야 할 사람이 한 명 불쑥 늘어난 것 밖에 안 됐으니까.


무엇보다 형인 준이치로 도련님이 못돼 먹었으니 분명 아우인 신지 도련님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다오.


신지 도련님은 저택에서 외따로 떨어진 별채에 머무셨소.


마쓰다 어르신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신지 도련님이 머무는 별채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하셨지만, 그 후로 큰 소리는 따로 내지 않으셨소. 내가 봤을 때는 그냥 신지 도련님의 존재 자체를 최대한 무시하려고 했던 것 같소.


준이치로 도련님은 자신의 동생을 보면서 툭하면 욕지거리를 내뱉었소.

멍텅구리니, 반푼이니, 머저리니 참 말도 많이 하셨지.


하인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내쫓았을 거라고 말했을 정도요. 하지만 마쓰다 어르신도, 준이치로 도련님도 왜 신지 도련님이 퇴학당해 집에 왔는지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소. 정확히 말하자면, 퇴학의 이유에 대해 말하는 걸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지.


어쨌든 이러다보니 하인들은 신지 도련님을 무슨 유령처럼 취급했소. 분명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안부를 묻지도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오. 그냥 때가 되면 밥을 가져다주고 빨랫감을 받아 가는 정도의 일만 했소. 그 큰 집에서 착한 나오미 마님만 오직 어린 시동생을 가엽게 생각했을 뿐이요.


그 무렵 하인들 사이에서 기묘한 소문이 돌았소.


신지 도련님이 퇴학을 당하고 집에 온건 한 조선인 기생 때문이라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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