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수프_매월이 (3)

by 심해해삼


4. 수프(Soup)_매월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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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마쓰다 어르신의 생신이었지.


하루 종일 집안이 찾아오는 손님들로 저택이 떠들썩했다오. 우리 하인들은 손님을 맞는데 정신이 없었지. 역시 명문가의 생신은 다르더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온갖 부자들과 고관대작들이 마쓰다 어르신을 뵈려고 줄을 섰지. 그들이 들고 온 선물만 해도 한 창고를 가득 채울 정도였소.


이름 난 악단까지 불러서 쿵짝쿵짝 온 종일 시끄러웠다오.

겨우 저녁 무렵이 돼서야 숨 돌릴 틈이 났소.


마쓰다 어르신은 조금 한가해지자 날 부르더니,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생신 잔치 때 하고 남은 음식을 신지 도련님에게 전해달라고 일렀소.


아무리 미워도 자식은 자식이었나 보지. 제 아무리 속물이라고 해도 다 같이 흥겨운 날에 아들 하나만 외따로 두는 건 마음에 쓰였을 거요.


그 말에 난 별 생각 없이 음식들을 준비해 별채 앞으로 갔소. 그리고 신지 도련님의 이름을 크게 불렀지. 하지만 답변이 없었다오.


평소라면 그냥 문간에 음식을 두고 갔겠지만, 그날 나는 분위기에 취해 술 한 잔을 걸치고 있던 상황이었소. 무엇보다 나름 신지 도련님과 친분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라 설마 이런 걸로 뭐라고 하겠냐는 생각에 기세 좋게 문을 열고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오.


복닥복닥한 저택 분위기와 달리 별채 안은 고요했소. 나는 음식을 들고 신지 도련님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지만, 답변은 없었다오.


잠이라도 주무시는 건가 싶었지. 그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게 열어주지 않았던 안방을 향해 바로 직행했소.


“신지 도련님, 츠기오에요. 저 왔어요! 어르신이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하셔서요. 지금 주무세요?”


닫혀 있던 안방 문을 열면서 일부러 어르신이라는 대목에 힘을 주었다오. 만약에 뭐라고 하면 마쓰다 어르신의 심부름이었다고 핑계를 댈 요령이었지. 문을 열자 묵은 공기 안에서 신지 도련님의 몸에서 나는 씁쓰레한 냄새가 훅 밀려왔소.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곱게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었소.


나도 모르게 놀라서 헛, 하고 숨을 삼켰지.

나는 뒤늦게 서야 매월이의 존재를 기억해 냈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그때는 해도 남자와 여자는 내외하던 시대였소. 남자가 멋대로 여자 머무는 방이 찾아오는 것도 흠이 될 수 있었지.


그래서 황급히 나가려는 순간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소.


매월이가 미동조차 하지 않는 거요. 나는 술기운에 흔들리는 정신을 가까스로 가다듬고 매월이를 다시 바라봤소. 부드럽게 내려앉은 눈 꼬리, 다홍색의 화사한 저고리, 곱게 땋은 머리카락……그 모든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오.


그 여인은, 그 여인은, 그 여인은 그림이었소!


정확히 말하자면, 병풍에 그려진 그림이었지. 우뚝 서 있는 병풍에 살아 있는 사람들 데려다 놓았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교하게 그려져 있더군. 마침 술기운이 어른어른 올라오던 차라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진짜 사람인 줄 알았을 정도라오.


봄이 배경인 것인지 꽃나무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새까지 앉아 있었다오. 그림 속 여인은 꽃나무 그늘 아래 앉아 누구를 기다리는 지 다소곳한 모습으로 눈을 차분히 감고 있었지.


“츠기오냐?”


때마침 신지 도련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소. 나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음식을 놓칠 뻔 했지.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뒤를 돌아봤소. 그러자 신지 도련님이 나른한 표정으로 히죽 히죽 웃고 있는 게 보였지.


“이놈아, 인기척이라도 하지. 무슨 괭이 새끼마냥 살금살금 들어와. 뒷간 갔다 오니까 방에서 발소리가 나서 도둑이라도 든 줄 알았다. 그래, 아버지가 내게 뭐라도 가져다주라고 하시든?”


다행이 신지 도련님은 나를 혼내지신 않으셨소. 신지 도련님은 나를 지나쳐 그림 앞에 주저앉으셨소. 그리고 방구석에 굴러다니던 긴 담뱃대를 줍더니 익숙한 자세로 뭔가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소. 나는 어렸을 몇 년 전 자살한 외삼촌이 그와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는 걸 몇 번인가 본적 있어서 그게 아편이라는 걸 바로 알아봤다오. 난 그때서야 뒤늦게 도련님의 몸에서 나는 씁쓰레한 냄새의 정체를 깨달았소. 신지 도련님은 여기서 몇날 며칠을 아편만 피우고 계셨던 거요.


신지 도련님은 아편을 몇 모금 피우시더니 헤벌쭉 웃으시며 병풍 속 그림을 향해 말을 거셨소. 꼭 사랑하는 연인한테 하는 것처럼 말이요.


“매월아. 이놈이 츠기오다. 몇 번 말한 적 있지? 어린놈이 여간 야무진 게 아니야. 너한테 하는 이 조선말은 다 츠기오한테 배웠단다.”


그리고는 내게 눈치를 주시더군.


“뭐해, 인사하지 않고서는. 매월이도 너랑 같은 조선인이다. 좀 더 일찍 소개해주고 싶었지만 우리 매월이가 여간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봐라, 나오미 형수님보다 더 곱지? 내가 별의별 여자를 만나봤지만 우리 매월이보다 더 참한 여자는 없더라.”


말을 잇는 신지 도련님의 모습은 내가 아는 신지 도련님과 달랐소. 그래, 꼭 미친 사람 같았지.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 쳤소. 그런데 뭔가 바스락하고 발에 밟히더군. 가만 보니 예전에 내가 꺾어다준 꽃이었소.


얼마나 그 자리에 오래됐는지 건초처럼 바짝 말라 있더이다. 꽃뿐만이 아니었소. 지금까지 내가 사다 날랐던 옷이며, 화장품이며, 장신구며 모두 그림 앞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지.


신지 도련님은 내가 무슨 심정인지 모르시는 건지 연거푸 아편만 피우셨소. 그러다가 갑자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시더군.


“매월아! 이 못된 계집아! 서방이 왔는데 언제가지 그렇게 새초롬하게 있을 거냐, 응? 이제 그만 눈 좀 뜨고 이 서방을 알아보란 말이다. 그래, 그래! 우리 매월이 참 곱다. 매월아, 매월아. 우리 임자. 우리 아버님이 미련하신 분이라 매월이 너 같이 참한 며느릿감을 못 알아봐서 야속하지?

괜찮다. 내가 너를 어떻게든 데리고 살겠다. 첩? 무슨 소리야! 네가 있는데 무슨 첩이야, 첩은! 나는 너 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제 입을 열어 뭐라고 말 좀 해다오.

내가 꽃이랑 옷이랑 네가 좋다는 건 뭐라도 다 해주마!

한 마디만, 한 마디만 해주련. 그게 어렵니? 응? 헤헤헤헤. 야속한 내 님아, 어여쁜 내 님아. 흐흐헤헤흐흐흐. 서방에게 말 한마디 안 해주는 못된 내 님아! 아하하하흐흐흐흑”


울다가, 웃다가, 욕을 하다가, 어르다가.


신지 도련님의 발작은 평소 친근한 모습만 봐왔던 내게 있어 엄청난 충격이었소. 신지 도련님은 내가 있었다는 것도 잊은 채 병풍에 몸을 기대어 애절하게 사랑을 구걸하셨지. 눈을 뒤집고, 침을 흘리고 바닥을 벅벅 긋고 몸을 이리 저리 뒤틀기까지 하셨소. 난 그 모습을 보다 못해 별채 밖으로 뛰어나왔다오.


그런데 때마침 근처에 있던 나오미 마님과 마주쳤지.

나오미 마님은 내 표정을 보더니 무서우리만큼 단호한 표정으로 물으셨소.


“봤구나. 그렇지?”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소.

그러자 나오미 마님은 짧게 한숨을 쉬셨소.


“너도 봤겠지만, 도련님은 정상이 아니야. 마음이 아프셔. 경성에서 돌아온 그 날 별채 안의 병풍 속 그림을 보여주며 혼례를 올리고 싶다고 말하시더구나. 우리 모두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버님은 충격으로 거의 쓰러질 뻔 하셨어. 우리 그이는 칼을 뽑아 들고 그림을 베어 찢어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지.

헌데 도련님이 만약 그림에게 무슨 짓이라도 하면 불 지르고 다 같이 죽어버리겠다고 거품을 무시는 바람에 그러진 못했어. 부탁이다. 오늘 본 일을 못 본 척 해다오. 만약 이게 바깥사람들이 알게 돼서 흠이라도 잡히면, 정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나오미 마님의 당부에 나는 연신 고개만 끄덕였소. 사실 바깥에 퍼트리고 다닐 것도 없었소. 그림에게 빠져서 그림과 맺어달라고 조르는 차남이라니. 그런 걸 누가 믿겠소? 나조차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면 실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게 분명하오.


이후 나는 의도적으로 신지 도련님과 거리를 뒀소. 한 번 실성한 모습을 보니 도저히 같이 있고 싶지 않더군. 무엇보다 눈을 까뒤집고 그림을 매월이라고 부르짖는 그 모습이 뇌리에서 잊혀 지지 않았다오.


신지 도련님은 내심 섭섭해 하는 것 같았지만, 대놓고 추궁하지는 않으셨다오. 내 생각이지만 본인도 대강 이유를 짐작하고 계셨던 것 같소.


그리고 그 해 8월 15일, 해방이 찾아왔소.



* * * * *



“그 정도로 심했다면 차라리 정신 병원에 보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이야기를 듣던 현아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러자 민욱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야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집안에 정신병자가 있다는 건 엄청난 창피였소. 그래서 가족 중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숨기기 급급했지.

더구나 마쓰다 어르신은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람이었소이다. 만약 차남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면 마쓰다 집안은 하루아침에 손가락질 대상이 될게 불 보듯 뻔했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지 도련님이 별채 밖으로 외출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는 거요. 잘만 숨기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지. 그래서 가족들 중 그 누구도 신지 도련님의 진실에 대해 대놓고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오. 나 역시 만약 그 날 들어가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겠지.”


민욱은 크게 헛기침을 한 뒤, 마저 이야기를 이어갔다.



* * * * *


마쓰다 어르신은 수지타산이 정말 빠른 분이었소.


패전 소식이 들려오자 그분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짐을 꾸렸소. 우리 하인들에게는 이렇다 할 지시도 내리지 않고, 정말 중요한 물건만 챙기고 식솔들만 꾸려서 바로 일본으로 돌아가셨지.


물론 누가 나서서 이 나라를 떠나라고 다그쳤던 건 아니오. 다만 본인이 평소에 조선인들에게 한 짓이 있던 만큼 어서 뜨는 게 이롭다고 생각했던 것 같소.


떠나던 그 날, 마쓰다 어르신과 준이치로 도련님은 하인들조차 대부분 잠들어 있는 새벽에 저택을 나가셨다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우연찮게 그분들이 도망치는 걸 볼 수 있었지.


양 손 가득 집을 들고 정말 믿을 사람 몇몇만 동행한 채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오. 내가 믿고 따르던 과연 그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궁색했거든.


무엇보다 그분들은 그냥 가지 않았소. 어디서 고용했을지 모를 장정 여럿을 호위하듯 옆에 두고 있었는데, 등치 큰 몇몇이 커다란 궤짝을 짊어지고 있었소이다. 그래서 멀리서도 눈에 띄더군. 난 곧바로 후다닥 뛰어갔소. 일본인이 되어 잘 먹고 잘살고 싶었던 만큼 그분들을 영영 놓치면 기회가 날아가 버릴 것 같았소이다.


“잠깐만요! 저도 데려가주세요!”


나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쫓아갔소. 여차하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데려가 달라고 떼라도 쓸 생각이었소.

그런 나를 나오미 마님이 막아섰소이다. 나오미 마님은 슬픈 얼굴로 나를 한참이고 바라보시다가 차분하게 이르셨소.


“츠기오야, 지금까지 고마웠다. 하지만 우리는 너를 데려가 줄 여유가 없어. 미안하다. 넌 똑똑하고 눈치가 빠르니 어딜 가도 잘 살 거다. 작별 선물이다. 필요할 때 쓰렴.”


그러면서 손에 끼고 있던 금가락지를 빼서 내 손에 쥐어주셨소. 눈물이 나왔지만 차마 더 조를 수가 없어서 우두커니 그분들이 가는 걸 지켜만 봤지. 그런데 궤짝 소리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소. 신지 도련님의 것이 분명했지.


준이치로 도련님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사색이 되시거니 나오미 마님을 재촉하셨소. 깨어나기 전에 어서 배에 타야 한다고 하시더군.


나오미 마님은 곧바로 남편을 따라 선착장으로 향하셨소. 차마 더 이상 데려가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점점 내게 멀어지는 걸 그저 지켜만 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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