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프(Soup)_매월이 (2)
그러니까 학교를 하던 중에 기생과 눈이 맞았는데, 그 기생과 노느라 학교도 빼먹고 놀러만 다니느라 결국 퇴학을 당했다는 거였소. 그런데 학교에서 쫓겨나면서 그 기생을 겁도 없이 집으로 데리고 왔다는 거요. 하지만 당연히 본채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별채에서 신지 도련님과 둘이서 숨죽이고 있다는 것이었소.
물론 이 말이 마쓰다 어르신의 귀에 들어갔다간 불호령이 널어질게 뻔하니 아무도 대놓고 물은 적 없었소. 그냥 아낙네들이 우물가에서 주고받는 실없는 소문처럼 입에서 입으로만 떠돌았을 뿐이었지.
하지만 나는 그 소문을 듣고 속으로 주판알을 튕겼다오.
만약, 아주 만약에 그 기생과 신지 도련님이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소. 난 그 순간마저도 집안의 아귀다툼이 어디로 흘러갈지 계산하고 있었소.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소.
만약 그 기생이 신지 도련님과 맺어지게 되면 그 기생은 이 마쓰다 집안의 작은 마님이 되는 거였소.
마쓰다 어른이 인정할 리는 없겠지만,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지 않소이까?
그렇다면 그 기생과 적당히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겠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소.
무엇보다 기생은 나와 같은 조선인이오. 이 집안에서 내가 편이 되어 준 다면 그 답례가 갑절이 되어 돌아올 것 같았지.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의도적으로 별채 근처를 기웃 거렸소. 그 기생이 언제 한 번 밖에 나오기라도 한다면 인사라도 할 요령이었소. 하지만 어째서인지 늦은 밤까지 그 기생은 별채 밖으로 얼굴을 보인 적 없었소.
다만, 때때로 신지 도련님의 목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려오곤 했다오. 여기서 사는 것은 좀 어떠냐. 오늘 달이 참 밝은데 나가지 못해서 답답하지, 응? 괜찮다, 이 서방이 곁에 있지 않느냐, 이러면서 하나 같이 꼭 토라진 연인을 달래는 것 같은 말들이었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들려오는 대답은 아무 것도 없었소. 난 혹시 그 기생이 사실 벙어리가 아닌가 생각했소. 만약 그 기생이 벙어리였다면 마츠다 어르신과 준이치로 도련님이 신지 도련님을 저렇게까지 천대하는 이유도 나름 납득되긴 했소. 공부하러 보낸 아들이 조선인 기생을, 그것도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을 데리고 왔다고 생각하면 나라도 피가 거꾸로 솟을 테니.
그렇게 며칠간 별채 근처에서 기웃거리고 있을 무렵 드디어 기회가 왔소. 신지 도련님이 문을 벌컥 열더니 마침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나를 불렀던 거요.
“야, 이리와 봐.”
난 곧바로 쪼르르 달려갔소. 신지 도련님을 가까이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오. 여러모로 부유한 도련님 티가 나긴 했지만, 머리가 헝클어지고 뺨이 움푹 파일 정도로 야윈 데다 눈언저리도 퀭해서 넋 빠진 사람처럼 보였지. 거기다 온 몸에서는 처음 맡아보는 씁쓰레한 냄새까지 났다오.
“네,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밖에 무슨 꽃이 제일 예쁘게 피었든?”
신지 도련님의 질문은 뜬금없었지만, 내색 하지 않고 답했소.
“지나오면서 보니 해당화가 예쁘게 피었던 걸요?”
“그래? 그러면 몇 송이 꺾어 오거라.”
난 그 말에 부리나케 해당화를 꺾어 신지 도련님에게 전해드렸소. 그러자 신지 도련님은 말없이 꽃만 안고 안으로 들어 가셨다오.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었지만 나는 상관없었소. 저 별채 안에 소문 속의 기생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게 내게는 무엇보다 값진 보상이었으니까.
그날 이후부터 나는 별채 근처에서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냈소. 그리고 신지 도련님이 나를 불러주길 기다렸지. 처음에는 신지 도련님도 나를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 하셨다오. 그냥 곁에 있으면 편하게 부리고 써먹을 수 있는 하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소.
당시 신지 도련님은 뭔가 날이 바짝 서 있었소. 당장이라도 누가 자기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뭐라고 쥐고 휘두를 것 같았지. 그런 신지 도련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시키는 것은 모조리 했소. 단순한 심부름부터 집안에 흐르는 분위기를 읽고 전해드리는 것까지 전부 도맡았지. 신지 도련님은 처음에는 심드렁하셨지만 조금씩 나를 의지하시기 시작하셨다오.
이러한 내 노력 덕에 우리는 퍽 친해졌소이다.
그 큰 저택에 말 붙일 사람은 나 밖에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오. 내 예상과 달리 신지 도련님은 형인 준이치로 도련님과 달리 매우 좋으신 분이였소. 비록 외모는 서리 맞은 수수깡 같았지만 넉살이 좋아서 꼭 오래 알고 지낸 넉살 좋은 동네 형 같았지,
하지만 신지 도련님은 날 절대 별채 안으로 들이지 않으셨소.
그냥 볕이 좋은 날이면 문간에 기대에 서서 두런두런 실없는 이야기만 주고받았지. 그러다가 때때로 내게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시키곤 했소.
빗을 사와라, 비녀를 사와라, 화장품을 사와라, 꽃을 꺾어 와라, 비단 치마를 사와라. 하나 같이 여인 마음에 드는 것들이었지.
나는 아마 별채 어딘가에 꽁꽁 숨겨 놓은 소문 속 기생을 위해 신지 도련님이 선물을 가져다 바치는 거라고 지레 짐작했소. 어찌됐든 그렇게 심부름을 시키는 순간에는 신지 도련님의 얼굴에 반짝 생기가 돌아오곤 했다오.
신지 도련님은 심부름을 시킬 때 마다 후하게 심부름 값을 주곤 하셨소. 하지만 난 한 번도 받지 않았다오. 일부로 받지 않았지. 난 그 때 더 큰 걸 노리고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기생의 눈에 들려고 했지만, 신지 도련님의 성격을 보고 대상을 바꿨소. 신지 도련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시다가 얼마 안가 내가 속뜻을 품고 있다는 걸 눈치 채셨지.
“돈 말고 다른 걸 원하는 구나, 그렇지?”
신지 도련님은 노골적으로 물으셨소. 난 뜨끔했지만 기회다 싶었소.
“네. 저는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 놈은 네가 처음이다. 그래, 뭘 원하느냐? 너도 나이가 나이니 술이라도 한 잔 사줄까?”
“아니요. 전 글이 배우고 싶습니다.”
그 말에 신지 도련님은 놀란 눈치였소. 하지만 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대놓고 매달렸다오.
“저는 말하는 법은 귀동냥으로 어찌 익혔지만, 쓰는 법은 아직 익히지 못했어요. 어설프게 몇 마디 읽을 줄은 알지만 전 제대로 된 글을 배우고 싶습니다.”
난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겨우 단어 몇 개만 겨우 읽을 줄 알았던 까막눈이었소. 당시에는 드문 일도 아니었지. 먹고 살기 바빠서 학교는 문턱 조차 밟지 못했으니까. 돈을 가지고 셈을 해야 했으니 숫자로 산수만 겨우 익혔소. 하지만 난 예전부터 글이 배우고 싶었소. 잘난 일본 사람들처럼 멋들어진 글을 척척 쓰면서 아는 척 좀 해보고 싶었다오.
“글? 글이 배우고 싶다고?”
신지 도련님은 재차 물으셨소. 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지. 그러자 신지 도련님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시더니 내게 제안하셨소.
“좋아. 앞으로 점심 먹고 두 시간 씩 글을 쓰는 법을 가르쳐 주마. 대신 너는 내게 조선말을 가르쳐다오.”
“조선말을요?”
“그래. 요즘 매월이한테 아무리 말을 걸어도 토라졌는지 대꾸를 하지 않아. 이렇게 답답한 집에 몇날며칠 동안 틀어 박혀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그래서 조선말을 배워서 조선말로 좀 달래주고 싶다. 내가 얼추 조선말은 읽고 쓸 줄 알지만 아직 일본어만큼 능숙하게 발음 하진 못하거든.”
그 말을 듣고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오. 어떻게 보면 일석이조였지. 별채에 드나들면서 신지 도련님에게 글도 배우고, 조선인 기생과도 친해질 수 있는 기회였소. 나는 그 즉시 좋다고 했지. 그 다음날부터 나는 별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오.
이후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소. 신지 도련님은 엘리트답게 일본어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어, 영어까지 쓰실 줄 아셨지. 거기다가 일본인으로는 드물게 한글까지 쓸 줄 아셨다오.
신지 도련님은 매월이가 한글 외에는 읽을 줄 몰라서 연애편지를 쓰려고 직접 독학했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소. 사실 난 그때 한글을 처음 배웠다오.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한국의 글을 배우다니, 웃기지 않소?
난 당시 필사적으로 쓰는 법을 배웠소. 신지 도련님 역시 내게서 온 힘을 다해 조선말을 배우셨지. 애정의 힘 덕분인지 얼마 안가 조선인과 크게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조선말을 익혔다오.
헌데, 몇 달 동안 별채에 드나드는 동안 난 단 한 번도 그 매월이란 이름의 기생을 보지 못했소. 아니, 신지 도련님이 거기까지 나를 들이지 않았다고 해야 옳겠지. 우리의 수업은 항상 별채 거실에서 진행됐소.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신지 도련님은 별채 안방으로 들어가셔서 두문분출 하셨지.
분명 매월이는 저 안방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차마 들어가진 못했소. 행여나 괜한 짓을 했다가 신지 도련님 눈 밖에 날까봐 무서웠거든.
내가 매월이를 직접 보게 된 것은 해방이 되기 딱 두 달 전 일이었다오.
* * * * *
“혹시 별채에 드나든다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지 않던가요?”
민욱이 숨을 돌리기 위해 잠시 이야기를 쉬던 틈을 타고 세라가 물었다. 민욱은 그 질문에 잠깐 눈을 감았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 했다.
“운이 좋게도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소. 나는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놈이었소. 신지 도련님의 자질구레한 일을 봐주는 것 역시 내 일의 연장선이라고 다들 보더군.
준이치로 도련님은 신지 도련님의 수발을 들어줘봤자 돌아오는 건 없다고 몇 번 타박하셨지만 딱히 나를 막지는 않으셨소. 나오미 마님은 앞서 말했듯 시동생을 가엾게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같이 나눠 먹으라며 양과자 같은 걸 들려 보내시곤 했다오.”
민욱은 몇 번 마른기침을 쿨럭이면서 설명 했다.
“그리고 신지 도련님은 천덕꾸러기인 했지만 어찌됐든 그 집안의 적자였소. 마쓰다 어르신은 대놓고 표현하진 않으셨지만, 나라도 신지 도련님을 챙겨줘서 다행이라는 눈치였다오. 다른 하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지. 덕분에 나는 글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배울 수 있었소.”
민욱은 몇 번인가 목을 가다듬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