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메인 요리_아득하고 거룩한 도서관에서 (3)

by 심해해삼


15. 메인 요리(Main Dish)_아득하고 거룩한 도서관에서 (3)



“타자기에 무슨 암호나 안내문 같은 건 없던가요?”


조용히 기담을 듣고 있던 철헌이 슬쩍 물었다.

이야기 하던 동우는 그 말을 듣고 곧장 고개를 저었다.


“없었어요. 그 흔한 상표 하나 없이 매끈하기만 했어요. 확실한 건, 그건 인간이 만든 물건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현아가 고개를 삐딱하게 젖은 채 질문을 던졌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타자기에는 이음부가 하나도 없었거든요.”


동우가 확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 그녀는 자신이 보았던 타자기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만약 공산품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어 붙인 부분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타자기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마치 타자기 자체가 하나 된 덩어리 같았죠.”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사뭇 심각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무튼 이쯤 되자 제가 알 수 없는 공간에 갇힌 것은, 어쩌면 이 타자기와 연관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 * * *


처음에는 제가 있던 공간의 한계도 시험해 볼 겸, 몇 번 인가 탁자와 타자기를 없애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제가 아무리 바라도 그건 변함이 없었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넘어트리거나 내던져 봐도 흠집하나 없었죠. 거기다 정신을 차리면 금세 멀쩡한 모습으로 똑같은 자리에 나타났어요. 이 끝없는 어두운 공간에서 탁자와 타자기만큼은 예외의 존재 같았어요. 이쯤 되자 어쩌면 이 공간에 갇힌 이유가 타자기 때문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죠.


아무튼 어둠 속의 생활에도 조금씩 문제가 찾아왔어요. 물론 먹고 자는 건 문제가 없었죠. 문제는 심심해 죽을 것 같다는 거였어요. 몸은 편했지만, 목적 없이 그저 무력하게 뒹구는 같아 견딜 수 없었죠.


그래서 저는 타자기 앞에 앉았어요.


누가 떠민 것은 아니에요. 작가들은 이따금씩 글을 쓰고 싶어 주체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머릿속에서 온갖 이야기가 떠오르고, 등장인물들이 자기 멋대로 떠들어대죠. 그것들을 바깥으로 쏟아내지 않으면, 의식 속에서 쉼 없이 맴돌아서 일상생활도 못해요.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무언가를 창작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본능이에요. 저 역시 그랬어요.


할릴 없이 어둠 속에 있다 보니 저절로 온갖 이야기가 떠올라서 머리가 아플 정도였어요. 무언가를 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죠. 생각도 비울 겸, 그리고 시간도 때울 겸 타자기에 손을 얹었어요. 신기하게도 타자기는 제 손에 딱 맞더군요. 마치 오랫동안 쓴 물건 같았죠.


탁.


타자기가 처음으로 움직였던 순간이 떠올라요. 소설의 첫 단어를 쓰기 위해 누르던 순간, 기묘한 떨림이 손끝에 전해졌어요. 꼭 작은 존재가 제 손 끝에 함성을 내지르는 기분이었죠.


탁, 타다다다닥, 탁탁.


그 함성은 글을 쓰면 쓸수록, 타자기를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강해졌어요. 저는 그 감각에 취해 쉼 없이 손가락을 움직였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타자기는, 아니, 저를 둘러 싼 공간은 ‘기뻐하고’ 있었어요. 제가 글을 쓴다는 것에,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한다는 사실에 열렬한 환호를 내질렀어요. 누가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타자기를 두드리면서 이 사실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죠.


아아, 너는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모든 것이 명쾌하게 풀리는 기분이었죠. 왜 이것을 미처 몰랐는지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죠.


신기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어요. 머릿속에 떠돌던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하나로 정렬 됐고, 등장인물의 움직임과 대화가 또렷해졌죠. 작가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글을 써왔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제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이 저를 붙들고 있는 기분이라고 하면 이해가 가시려나요?


금세 책상에는 글이 원고가 수북하게 쌓였어요. 종이 걱정은 할 것도 없었죠. 그냥 떠올리기만 해도 솟아나니까요.


이후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은 채 쉼 없이 타자기로 글을 써내려갔어요. 필요한 건 언제라도 불러낼 수 있으니, 그야말로 무언가를 쓰기에는 최적의 상황인 셈이었죠.


그렇게 얼마나 글을 썼을까요. 잠시 쉴 겸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문득 주위에 끝도 없이 펼쳐진 어두운 공간에 대해 궁금해지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무서워서 섣불리 이 백열등 빛이 있는 일대를 벗어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적응을 한 덕분인지, 조금씩 호기심이 생겼어요. 어쩌면 저 어둠 너머에 저를 납치해 온 존재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게 외계인인지, 신인지, 아니면 제가 상상 못할 거대한 존재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어요. 그래도 한 번 호기심이 생기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죠. 그래도 저를 부족함 없이 챙겨주는 존재니, 제가 나서서 만나러 왔다고 해도 딱히 화를 낼 것 같지는 않았고요.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후, 저는 본격적으로 어둠 속을 탐험할 계획을 세웠어요. 거창할 건 없었어요. 그냥 특정 방향을 정하고, 거기만 보고 무작정 걷기로 마음먹은 정도였거든요. 바라기만 해도 손전등이나 헤드 랜턴 것이 저절로 튀어나왔기에 도구 걱정은 할 것도 없었어요.


이후 적당히 앞을 밝힐 만한 것으로 중무장을 한 뒤에 무작정 앞을 보고 걸었어요. 물론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으면 큰일이었기에 일정 거리마다 반짝이는 야광 페인트로 표식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죠.


체감 상 1시간 정도 걸었을까요? 아무리 걸어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아 슬슬 지루해질 참이었죠.


무언가 제 앞에 나타났어요.

그게 뭐냐고요?

‘벽’이었어요.

아니, 그것은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끝도 없는 어둠 너머에서 무언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어요. 제가 걷고 걸어서 드디어 이 공간의 끝에 도달했다고만 생각했죠. 무엇보다 벽을 짚고 걸으면 대략적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으니, 이 알 수 없는 공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낼 수 있겠다 싶었어요.


하지만 제가 벽이라고 믿었던 것에 손을 댄 순간, 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챘죠.

그건 벽이 아니었어요.

책, 그것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책이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요?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읽고, 써 왔던 몸이에요. 대략 손으로 느껴지는 감촉만으로도 바로 알아 챌 수 있죠.


저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손가락 마디마디에 느껴지는 까슬까슬한 종이의 촉감은 진짜였죠. 그래서 화들짝 놀라 손전등으로 일대를 비춰보니, 우뚝 솟은 거대한 책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제 눈에 들어오더군요.


책은 한 권이 아니었어요. 거대한 책을 필두로 주위에는 온갖 종류와 크기의 책들이 가지런히 꽂힌 채 세워져 있었죠. 그중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책부터, 제 키만 한 거대한 책들도 있었어요.


크기와 언어는 제각기 달랐지만, 모두 하나 같이 우리가 아는 책의 모습을 하고 있었죠. 꼭 책으로 이뤄진 견고한 성을 보는 기분에 아득한 기분까지 들더군요.


그렇게 끝없는 책의 행렬을 따라 걷던 중에, 빨간 표지의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어요. 이유는 몰라요. 그냥 책이 저를 부르는 것 같았죠. 별 생각 없이 빨간 표지의 책을 꺼냈는데,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보고 순간 눈을 의심했어요.


[Agatha Christie]


그 책은 추리의 여왕이라 불리던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이었어요!


이제 와서 이런 말하기 부끄럽지만, 저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 푹 빠져서 영문학을 전공한 것은 물론 작가의 길도 걷게 됐어요. 제게 있어 애거서 크리스티는 인생을 이끌어준 은인이나 다름없죠.


물론 애거서 크리스티가 워낙 유명한 작가인 만큼, 이런 곳에 책이 꽂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어요. 애거서 크리스트의 소설은 번역 되어 전 세계에 알려졌으니까요. 문제는 아무리 봐도 그 책은 제가 읽은 적이 없는 소설이라는 거예요. 저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팬으로서 그녀가 남긴 모든 소설을 모조리 섭렵했어요, 그런데 저조차 모르는 책이라니,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탐험하던 것도 잊고, 그 자리에 앉아 바로 책을 읽어 내려갔어요. 읽으면 읽을수록, 이건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작품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게 됐죠. 문장이나 표현, 진행이나 등장인물까지 모조리 그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것들이었거든요. 절대 누군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름을 도용해서 쓴 작품이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왜 나조차 모르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이 여기에 있는 걸까. 책을 다 읽은 후 앉아서 한참을 고민했죠. 그러다 책의 활자 형태나 잉크의 번짐이 지금껏 제가 타자기를 통해 써왔던 원고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곧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또렷하게 떠오르더군요.

이 책은 처음부터 바깥에서 가져온 게 아니었어요.

바로 여기서, 이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애거서 크리스티도 저처럼 이 알 수 없는 공간에 붙들려서 반강제로 소설을 썼던 거죠.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뒤이어 한 가지 확신이 들었어요.

마치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알고 있던 것처럼 말이죠.


제가 여기에 온 이유.


그건 바로 여기에 작가로서 ‘책’을 더하기 위함이라고요.



* * * * *



“사실 그렇게 밖에 생각할 도리가 없었어요. 완벽한 작업 환경과 절대 부서지지 않는 타자기, 그리고 끝없이 쌓인 책까지. 모든 것이 제게 이 공간의 의의를 말해주는 것 같았 거든요.”


동우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광열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양식을 한 거네? 우리가 물고기를 가둬 기르는 것처럼 말이야.”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죠? 그들이 노리는 건 제 몸이 아니라 제 글이었지만요.”


동우는 그 의견을 긍정했다.

그러자 민욱도 나서서 한 마디 했다.


“작가를 가두는 양식장이라, 참 신기한 곳이군.”


거기까지 들은 동우가 허심탄회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작가로서 한 번 쯤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작업실을 꿈꿔오긴 했었어요. 그게 그런 식으로 이뤄질 줄은 몰랐지만요.”


현아도 그녀의 의견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글을 쓰기 위해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긴 하네요.”

“맞아요. 아무래도 그 공간을 만든 존재는 어떻게 해야 좋은 글이 나오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동우는 긍정을 표하며 스테이크를 마저 썰었다. 스테이크에서 새어나오는 고기 육즙이 접시 안에 흥건히 고였다. 그녀는 그렇게 잘라낸 고기에 소스를 바르며 말을 이었다.


“안락함, 무료함, 그리고 끝없는 시간. 이것만큼 걸작을 완성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조건들은 없거든요. 조선 시대에 유배된 선비들이 글쓰기에 몰입했던 것처럼 말이죠.”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말 잊지 못할 존재를 만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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