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진 않지만, 색다른 여행
‘그럭저럭’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로’라는 뜻이다. 그럭저럭이라는 단어의 설명으로 딱이라는 생각이 든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만 이해가 가는 그런 설명이라는 생각에 국어사전을 보며 피식 웃었다.
무진기행의 무진이라는 공간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 또한 그럭저럭이다. 오륙만이나 되는 인구가 사는 공간이지만, 특별한 명산물도 없는 자랑할만한 곳도 없는 그런 공간이다. 그래서 무진기행이라는 제목은 이질적이다. 아무도 특별함이 없는 곳을 기행씩이나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행을 하는 곳이 그럭저럭이라는 무진이라면, 작가는 충분하지 않은 공간을 기행하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궁금해진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에서 무진이라는 공간은 큰 역할을 한다. 주인공 희중은 서울에서 재혼한 처와 부유한 처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무진은 희중이 젊은 시절을 보낸 공간이라는 점에서 공간으로써 서울과 대비되기도 하지만, 현재와 과거라는 시간적인 대비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무진이라는 공간의 특징을 전달하기 위해 무진을 상징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계속해서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안개가 그렇다. 안갯속은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 불분명하다는 것은 혼란을 의미한다. 서울을 떠나 무진으로 향하는 버스 안, 열린 차창으로 유월의 바람이 주인공을 반수면 상태로 끌어넣는다. 수면의 상태는 완전히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반면 반수면 상태는 어떤가?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그 어느 지점에서 안갯속 공간만큼이나 혼란스럽고 불분명한 상태가 반수면 상태이다.
작가는 무진은 어떤 곳이라고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독자는 작가가 제시한 이미지들을 따라 문장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무진이라는 공간을 여행하게 되고, 무진의 특징을 이해하게 된다. 심지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저자의 내공을 엿보기에 충분한 설정이다.
주인공 희중에게 젊은 시절 무진은 무기력한 나날을 보낸 곳이다. 안갯속 인간이 스스로 헤쳐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희중은 스스로의 의지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 희중에게 무진은 골방이었다. 주변 친구들이 전쟁에 참여할 때,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홀어머니의 뜻에 따라 숨어 지내야 했다. 그 골방에서 정신은 죽었지만, 육체는 살아있는 미친 여자처럼 수음밖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제약회사 중역이 되어 주변의 시선으로는 성공한 희중은 여전히 무기력하다. 하지만 그런 희중에게 무진은 무기력한 청춘에 대한 회한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공간에서 꿈꾸지 못한 일탈의 공간이기도 하다.
일탈의 공간인 무진에서 후배인 하와 친구인 조, 그리고 하인숙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순수한 청년인 하는 정신은 죽고 육체만 살아있기 이전의 주인공의 모습, 희중이 지향하는 모습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해 조는 세속적인 인물로 희중은 조를 경멸하지만,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조는 희중과 많이 닮아있다.
하인숙은 무진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럭저럭한 무진은 인숙에게 그저 심심한 곳이다. 그런 무진을 떠나 인숙은 서울에 가고자 하는 욕망과 목표가 확실한 인물이다. 하지만 확고한 욕망에 비해 스스로 떠나지 못하는 인숙은 주인공과 많이 닮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은 잠깐이지만 연인의 관계로 발전한다. 그리고 하룻밤을 보낸 인숙은 희중을 따라 서울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아마도 인숙은 희중에 대해 진짜 사랑의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닐까? 하지만 희중도 인숙을 사랑했을까? 유부남인 희중에게 인숙은 사랑이라는 청춘의 감정을 다시 한번 느끼기 위한 도구란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하지만 죽은 여인의 시신을 보며 정욕을 느끼는 그런 일탈까지도 가능한 무진에서 희중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인숙에게 편지를 전하지 않고 무진을 떠나는 희중의 모습에 답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공기의 저온,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로 만든 수면제, 희중이 공상한 수면은 죽음과 닮아있다. 청산가리를 먹고 이미 죽음에 이른 여인을 보며 나의 일부라 느끼는 희중을 보면 그는 모든 것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꿈꾼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반수면 상태인 안개에 싸인 무진은 주인공에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럭저럭한 공간일 수밖에 없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주인공의 무기력함에 그리고 그의 이기적 욕망에 혼란스럽다. 그리고 그런 주인공이 조용히 서울로 향하는 결말도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냈던 사람들 중에 희중과 같은 혼란과 무기력함을 느꼈을 사람들은 많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고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 소설의 역할이라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것 또한 소설이 해야 할 일이다. 무진기행은 자기의 그릇을 충분히 채웠다.
무진기행의 미덕 중 하나는 문장이다. 공간이 주는 의미가 큰 소설인 만큼 공간에 대한 묘사가 이 소설에서 해야 하는 역할은 막중하다. 그런데 작가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썼다.
‘언젠가 여름밤, 멀고 가까운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 마치 수많은 비단 조개껍질을 한꺼번에 맞비빌 때 나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나는 그 개구리울음소리들이 나의 감각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없는 많은 별들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느끼곤 했다’ 오감을 모두 동원해 공간과 감정을 표현하는 작가의 문장력은 문장을 읽는 순간 독자의 머릿속에 그림으로 재현된다.
좋은 자연을 보고, 화려한 풍경에 감탄하고, 지역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여행이 주는 즐거움만큼 큰 행복은 없다. 무진이라는 그럭저럭한 작은 시골 마을으로의 여행은 특별할 것도 없고, 탄성을 지을만한 풍경도 지갑을 열 만한 특산물도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문득 생각나는 잊히지 않는 그런 여행이었다. 색다른 여행이 주는 즐거움을 느낄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