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책과 나 07화

난 너무 늙었어

(feat. 노인과 바다)

by 최고수정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책의 초반부터 주인공은 겸손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난 너무 늙었어”라는 문장이 여러 번 나온다. 노인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바다’에서 수십 년을 지내 와서 그런 걸까. 노쇠함마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듯 힘이 더 이상 세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나는 묘한 기대감과 숭고함을 갖기 시작했다.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를 적군으로 보지 않은 점은 특이했다. 팔씨름을 하더라도 상대를 넘어뜨려야 할 적으로 보지 않는가. 그런데 노인은 줄곧 물고기를 아이 다루듯 달래는 어투를 유지해서 놀랐다.(이인규 옮김. 문학동네) 그 필터를 끼고 내용을 되짚어 보니, 햇빛이든 달빛이든 지나가는 바닷새든 말벗이 되어주는 소년이든 뭐든 존중하는 작가의 시선이 감지됐다. 자신이 늙었다고 하는데도 본인을 존중하는 게 느껴졌다. 초연함이라고 할까. 심지어 노인은 자신이 잡은 물고기에 대한 강한 애정마저 드러냈다.


물고기가 살아있을 때 녀석을 사랑했고, 죽은 뒤에도 사랑했어.


체력이 없는 노인이지만 그에게는 고기잡이에 대한 의지나 요령은 있다. 책을 통틀어 볼 때 극심한 통증과 현기증까지 이겨내는 인내야말로 노인의 핵심 자산이었다. 나는 그것을 생(生)에 대한 강력한 의지로 봤다. 실제로 이 소설은 인간 존엄에 대한 감동 서사로 칭송받고 있다. 대개 의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지만, 작가는 잡은 물고기의 살점이 포식자들에게 다 뜯겨나가더라도 항구로 가져오게 성공시킴으로써 의지를 눈에 보이게 했다.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먹으려고 공격해 오는 청상아리에 맞서는 장면에서 손에 땀을 쥐었다. 삶에 대한, 특히 어부로서의 삶에 대한 의지가 너무도 명료하게 보였다. 노인은 수중에 없는 칼이나 도끼는 생각하지 않고, 배 안에 있는 키 손잡이나 노로 어떻게든 공격을 이어 나갈 궁리를 했다.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라는 정신이 명확하게 보여 숨이 멎을 정도였다. 결국 노인은 자신의 오두막으로 돌아와 사람들의 존경과 보살핌을 받는다. 잠이 든 것처럼, 꿈을 꾸는 것처럼 눈 감은 노인은 더 이상 ‘난 너무 늙었어’라고 말하지 않을 것 같다. 나지막이 읊조리는 혼잣말로 이건 어떨까? 난 너무 대단해.


낚싯줄에 목숨을 건 이야기에 몰입해서일까, 줄다리기 때가 생각났다. 맞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의 그 줄다리기다. 내 초등학교가 아닌 아이의 초등학교 운동회. 작년 가을 기쁘고 설렌 마음을 안고 나도 아이를 응원하러 운동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학부모들이 참가해야 한다는 줄다리기 순서가 오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힘을 써야 한다는 게 너무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날 처음 알게 된 우리 반 어머니들과 목청 높여 소리를 지르던 사람은 어디 가고 갑자기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당당히(?) 안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넉살 좋은 어머니 한 명은 1980년 대생들은 무조건 출전해야 한다며 내 팔을 이끌었으나, 부상 중이라는 핑계로 나는 사진과 동영상을 담당했다. 실제 이유는 “난 너무 늙었어”였다. 그럴 만한 것이 자녀들은 동갑일지언정 그날 통성명한 이들과 나는 적게는 4살, 많으면 8~9살 차이가 났다.


생각해 보면 운동회 참가 기회도 초6까지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 그냥 즐기면 되는 거였는데. 올해는 “난 너무 대단해”라고 외치며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소설 <노인과 바다>처럼 굶주림에 3박 4일을 버티는 것도 아닐 텐데, 마지막 한 방울 남은 삶의 기력을 소진하는 것도 아닐 텐데. 상대편 참가자들도 존중해 가며, 심판도 존중해 가며, 그날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출전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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