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책과 나 06화

호기심에 잡아먹힌 사람

(feat. 맡겨진 소녀)

by 최고수정

도서관에서 기획한 책 읽기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독서동아리와 관련된 수업이어서 좋은 책을 다양하게 추천받겠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사는 첫 수업부터 각자 추천하고 싶은 책을 정해 오라고 했다. 한 수강생이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라는 소설을 알려줬다. 그는 이 책을 정말 사랑하는 듯했다. ‘이 작품 모르는 사람 없게 해 주세요’라는 마음이 너무나 잘 보였다고나 할까.


이 소설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의 엔진이 슬슬 가동되던 어느 날, 첫 페이지를 펼치게 됐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도서관 체험 수업에 아이를 데려다준 날이었다. 수업이 무려 2시간이나 진행됐다. 마침 <맡겨진 소녀>가 떠올랐고, 불현듯 이곳에 영어 원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일었다. 원서도 번역본도 ‘대출가능’했다. 내게는 그날따라 노트와 펜도 있었다. 시간이 났을 때 지금 당장 필사를 시작하라고 온 우주가 종용하는 것만 같았다. 읽을 운명이었던 것일까. 그런데 원문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필사하게 될지도. 물론 펑펑 울게 될지도 몰랐다.


소설은 제목 그대로 부모가 자녀들 중 딸 한 명을 잠시 친척 부부에게 위탁하면서 시작된다. 소녀와 킨셀라 부부 사이에 있었던 일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궁금증 가득한 마음으로 읽어갔다. 다소 무뚝뚝하고 건조한 친부모에게서 벗어난 소녀는 처음에는 어색해 하지만 점점 이들 부부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다.


남자아이를 키워 본 적 있는 부부의 사연이 나왔을 때 나는 한껏 몰입한 상태였다. 수다스러운 동네 사람 밀드레드가 등장해 ‘그것도 몰랐냐’는 식으로 소녀를 책망하는 대목이 나온다. 멍청(dope)하다고까지 했다. 내가 보기엔 호기심에 잡아먹힌 이 이웃 아주머니가 소설의 최강 빌런이었다. 그녀는 소녀와 단둘이 있을 때를 틈타 부부의 시시콜콜한 사정, 이를테면 창고에 식재료가 조금 있는지 가득 찼는지부터 온갖 질문을 쏟아붓는다. 그러면서 소설은 두 번째 국면으로 넘어가게 된다. 작가는 ‘말을 해야 할 때를 알고, 필요 없을 때를 알자’고 강조하려고 이 소설을 집필한 것 같았다. 소녀와 킨셀라 아저씨의 바닷가 산책 장면도 압도적인데, 이들의 대화에서 나는 드디어 주제문을 찾았다.


입 다물기 딱 좋은 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맡겨진 소녀는 맡겨진 집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배우고 성장해 온다. 타인의 비밀이나 슬픔을 어떻게 다루고 공감해야 할지 터득한 것이다. 저급한 호기심으로 남의 이야기를 쉽게 수군거리는 사람들과 달리 침묵해야 할 때를 깨닫는다. 적어도 소설 속 소녀는 경솔하지 않은 어른이 될 것 같다.



한 때 내가 존경하던 어른이 있었다. 회사에서도 고위직이었고, 평소의 성품도 온화해 인기 있는 사람이었다. 따르는 후배나 친구들도 많아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내게 충격적인 말을 했다. 지인인 OOO이 게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이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당사자에겐 아픔일 수도 있는 말을 거침없이 한 점이 나를 너무도 놀라게 했다. 아, 그는 단순히 뒷담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걸까. 아니면 나와의 친밀감을 키우기 위해 어떤 얘기라도 소재로 활용해야 했던 걸까. 내가 사람 보는 눈이 너무 없었다.


누군가의 사생활, 특히 성적취향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 사람이 말해 준 사실은 내게 아무 정보도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난데없이 시끄러운 소음에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밀드레드의 폭로가 소설의 국면을 바꿔놓았다면, 그 일 이후로 나는 험담에 더욱 민감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누구는 동성애자라느니 누구는 이혼남이라느니 혹은 이혼 가정의 자녀라느니. 이런 얘기들을 재미로 즐기지는 않았는지 나는 반성한다. <맡겨진 소녀>라는 작품 덕분에. 기준을 반듯하게 세워두지 않으면 일상 곳곳에서 이런 소음을 만나게 된다. 입이 무거운 사람이 될 것이다! 당신 주변에도 재미라는 호기심에 통째로 잡아먹힌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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