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필경사 바틀비)
여기 변호사가 한 명 있다. 뉴욕 월스트리트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는 법률 필경사 두 명과 사환인 소년 하나가 함께 일하고 있다. 필경사는 문서를 일일이 손으로 카피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1853년에 출간된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는 백 년이 넘은 지금도 독자들에게 특별한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미국 금융의 심장부에서 바틀비는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외쳤다. 그의 사연은 무엇이었고, 현시대와는 어떤 다른 점이 있을까?
사무실의 업무량이 늘면서 변호사는 구인 광고를 낸다. 가련할 정도로 점잖고, 창백하고, 쓸쓸한 모습의 바틀비가 그렇게 변호사의 삶에 침투하기 시작한다. 첫 사흘만 해도 바틀비는 어마어마한 양의 필사를 했다. 변호사가 서류작업 한 것을 검토하자고 했을 때, 그는 문학사에 남을 명대사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답한다. 번역자에 따라서는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후에도 바틀비는 합리적으로 굴고 싶지 않다느니, 혼자 있고 싶다느니, 그러고 싶지 않다느니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기조를 유지한다.
고용주에게 자신이 맡은 일을 안 하겠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유인(?)이 몇이나 될까. 참 주체적으로 보이긴 했다. 업무를 안 하겠다는 그의 신념은 납득이 되지 않지만, 부속품으로 살지만은 않겠다는 의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 사무실의 접이식 칸막이 뒤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점이었다. 이런 고집이 가정도 아닌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으려나.
그를 내쫓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깨달은 변호사는 사무실 이전을 단행해 버린다. 일종의 포기였다. 그래도 바틀비는 변하지 않았다. 급기야 변호사가 자신의 집에서 같이 지내자고 제안하지만, 그는 해고된 직장의 구석에 기거할 뿐이다.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든,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든 그는 삶에 한 점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삶의 목적이 없는 바틀비에게 나는 이상하게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그를 보며 느끼는 측은함이 내가 가진 인간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안쓰럽고 가여웠다.
직장에서 자신 있게 작업을 거부할 때는 그에게서 자유로움을 엿보았지만, 나중에 곡기를 끊고 세상과 작별할 때 그는 얼마만큼 자유로웠을지 궁금하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해석이 많다. 혹자는 자본주의라고 하기도 하지만, 나는 작가가 인생의 의미를 잃은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 한 것 같았다. 그가 풍겨내는 인생의 허무함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도 20대 중반에 잠깐 시간제 임금을 받고 일한 경험이 있다. 블루칼라 직군이었다. 조직의 관리자는 높은 생산성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았다. 속도와 효율이 최고의 가치였다. 노동자들의 퇴근을 칼같이 시켜줬으면 좋았겠지만, 그에게는 출근 시간을 지켰는지가 더 중요했다. 나는 기계처럼 반복되는 단순 작업에 지쳐갔다. 무력한 일꾼이었던 나와 동료들은 아프기라도 하면 바로바로 다른 일당으로 대체되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이 일을 그만두었을 때였나. 나도 바틀비처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 끼니 대용으로 마신 우유 팩들을 층층이 쌓아두었을 때가 있었다. 문 앞에 배송된 택배 상자를 뜯지 않고 방치했다. 형광등 버튼 하나 누르기 귀찮아 칠흑 같은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가, 내 인생의 바틀비 시절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다시 세수하고 외출하는 삶으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다. 인생의 노잼(no 재미) 시기에 만약 이 소설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월요일 아침에 가야 할 학교나 회사가 너무 싫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미치도록 하기 싫어 땡땡이치고만 싶을 때. 사회에서 그림자 취급당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무시됐을 때,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올 때, 이 책을 한 번 권해본다. 그냥 잠이나 자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필경사 바틀비>를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죽고 싶지만 바틀비라도 읽어보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