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책과 나 10화

필사와 여행

(feat. 메밀꽃 필 무렵)

by 최고수정

“이번에 봉평 가려고”

“악!!”

“그래, 거기 이효석 문학관도 간다”


몇 년 전 주말 계획을 세우던 ‘꼼꼼이’ 남편은 나의 “악” 한마디에 단박에 내 마음을 읽어냈다. 말인즉슨 발왕산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짠 평창 여행 일정을 내게 브리핑하겠다는 소리다. 아이와 함께 문학관에도 간다는 데 나는 동참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보아하니 부자 둘만의 계획이 아니라 나를 데리고 가기 위해 준비한 필수 코스였다.


그리하여 강원도에 도착할 때까지 며칠간 나는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라는 말을 곱씹어댔다. 이 문장은 거산 이효석이 봉평 지역을 배경으로 쓴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다. 여운을 길게 남기는 말이기도 했지만, 문학관에 간다고 하니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평창행 자가용에 오르기 전에 소설 필사를 해야 했다. 멋도 모르고 문학관에 이르자 나는 우사인볼트 스타트 속도와 맞먹는 능력으로 야외 포토존으로 튀어나가기에 이르렀다. 마음이 몽글몽글한 채로 실내 문학전시실로도 들어가 그의 작품세계에 빠져들었다. 참고로 메밀 자료실까지 별도로 구성돼 있었다.


사실은 문학관에 도착하기 앞서 봉평시장에 주차할 때부터 비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아점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을 때부터 나는 소설 속 한가운데로 접어들었다. 성 서방네 처녀를 처음 만난 물방앗간 장면, 부드러운 달빛이 흐붓이 흐르는 장면, 동이가 물에 빠진 허 생원을 구하는 장면, 숨이 막힐 지경의 메밀꽃 밭을 세 사람이 지나는 장면 등이 골목 담벼락에 그려져 있었다. 나중에 보니 주차장 곳곳에도 동이가 허 생원을 업은 모양의 조형물이나 작품 속 짧은 문구가 적힌 건물 벽 등 이효석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나도 갑자기 아이를 업고 포즈를 취하지 않았겠는가.


평창에서 돌아와 이 소설 전문을 필사했다. 아, 필사가 이런 것이었나. 필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허 생원과 나귀가 이토록 각별한 사이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장담한다. 예를 들면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같은 문장을 펜으로 적었을 때를 보자. 쓸 때는 읽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세월’이라는 단어에 나는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문학관에 갔을 때 거대 당나귀 모양으로 만들어진 건물이 인상 깊었기 때문에 관계에 대한 묘사가 눈에 잘 들어왔을 수 있다.


필사를 할 땐 몰랐다. 내 필체를 다시 들여다보게 될 줄. 필사해 놓은 글을 다시 보니 작가가 표현해 놓은 문장들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어휘들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상황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해 주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우리말이 사랑스러워졌다. 특히 형용사들이 토속적이면서도 정감 있었다. 흐붓하게, 춥춥스럽게, 짜장, 쭝긋하고, 서름서름한, 가스러진, 개진개진, 앵돌아진……


필사를 해보니 여행 가기 전에 필사를 해볼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작품을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메밀꽃에 대한 묘사도 대단해 보였다. 필사를 하면 더 자세히 보이기 마련이다. 필사한 이후에 알게 된 것들을 봉평에 가기 전에 알았더라면. 내가 느낀 작가에 대한 존경심은 훨씬 더 풍부해졌을 것이다. 또 하나, 필사 이후 메밀꽃이 만발했을 때 봉평의 모습이 무척 보고 싶어졌다. 작품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욕심이 자꾸 커졌다. 작가의 눈에 들어왔던 소금을 뿌린 듯한 모습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지난해 봄 김영하 작가가 산문집 <여행의 이유>를 재발간했다. 당시 작가가 온라인 팬 사인회를 개최한다고 깜짝 공지한 적이 있다. 교보문고 유튜브 Live를 통해서다. 책 구매를 인증한 독자에게 김영하 작가가 서명을 하면서, 진행자의 질문에 대답도 하고 있었다. 내 시선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채팅창에 올려놓는 여행과 관련된 말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이렇게 적었다. ‘그렇다면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봉평에는 몇 월에 여행해야 할까요?’ 나는 번개처럼 ‘꽃핀 모습을 보려면 9월’이라고 답하고 혼자 흐뭇해했다. 9월 초중순을 꼭 노리길! 아~ 필사하고 떠나라고 말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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