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책과 나 13화

아무것도 아닌 사람

(feat. 작은 땅의 야수들)

by 최고수정


김주혜 작가의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은 남정호가 주인공이다. 정호와 그의 스승 이명보의 서사일 수도 있겠다. 각자의 인생이 따로 전개되다가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나도 모르게 숨죽이며 지켜봤기 때문이다. 혹자는 안옥희에 대한 정호의 러브스토리로 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1910년 대쯤 태어난 가난하거나 보잘것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른바 민초들. 그들은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들의 후세이며 일본군 부총독의 가슴팍에 총알을 박아 넣는 영웅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작가는 야수라고 이름 붙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호랑이.


전래 동화 <호랑이 형님>에서부터 이 소설은 시작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호의 이름부터 정의로운 호랑이라는 뜻이니까. 정호의 아버지 남경수가 포수였다는 설정도 의미심장하다. 사냥꾼인데도 그는 어린 호랑이는 살려두라거나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닌 이상 공격하지 말라고 아들에게 가르쳤다. 그럼에도 우리 땅의 호랑이들은 멸종되다시피 했다. 죽은 호랑이의 가죽만이 비싼 값에 일본인 장교의 손에 들어가거나 친일파 지식인의 넓은 거실을 장식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우리 민족의 기개와 용기의 상징으로서 호랑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왠지 가슴이 웅장해졌다.


일본 군인 야마다 겐조는 나름 중요 인물이었다. 그는 소설 초반에 깊은 산속에서 경수에게 목숨을 빚진 적이 있는데 인연의 표시로 은으로 된 담뱃갑을 준다. 담뱃갑은 정호에게 아버지의 유품으로 남았고 야마다와 정호의 만남을 성사시킨다. 이 부분은 복선으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읽는 내내 야마다가 정호의 인생에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할지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솔직히 나는 야마다가 등장할 때마다 긴장했다. 작가가 인물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 깊게 고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작가의 묘사력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인물의 성격이나 처지를 설명해 주는 것 이외에도, 일제 강점기의 한반도 한가운데에 내가 있는 듯했다. 분명히 어제의 나는 만주 땅에 있었는데 오늘의 나는 서울의 핫 플레이스에 당도해 있었다. 물론 <밀정>, <말모이> 같은 영화가 구현해 놓은 시대상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렇겠지만 배경이 되는 장소 하나하나가 눈에 그려졌다. 이를테면 정호가 오랜 추억이 깃든 다리에 갈 때마다 돌덩이 표면에도 묻어 있는 그의 슬픔과 그리움이 보였다고나 할까. 작가의 능력에 크게 감탄했다. 그래서 2024 톨스토이 문학상도 거침없이 수상 했겠지만.


로맨스의 측면으로 보자면 영화 <모던 보이>의 원작 소설인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가 연상됐다. 이 작품은 독립운동가가 여자지만, 김주혜의 소설은 그것의 남자 버전 느낌이다. 정호는 경성에서나 상해에서나 한결같이 옥희를 떠올리며 살아 나간다. 꼬마일 때부터 한순간도 죽음의 위협에서부터 벗어나 본 적 없는 그는 마침내 자유로워질 때 옥희로부터 위안을 받는다. 조선 때나, 일제 때나, 공화국 때나 정호처럼 순수한 사랑에 온몸을 던진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삶과 사랑만큼 또 고귀한 것은 없을 것 같다. 조상님들의 열렬한 연심 덕분에 현재의 내가 있음을, 조국이 있음을 감사하게 느끼게 된다. 심지어 김주혜 작가도 이 책을 어머니와 아버지께 드린다고 밝혔다.


급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 지금 우리에게 왜 필요한 것일까. 작가는 살아있으라는 그 한마디 명령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다. 비록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친구는 배신하고 나쁜 놈들만 승승장구하는 현실은 악독하지만 말이다. 끝까지 버티고 버텨보자. 마지막으로 치닫는 인생의 기차 위에 올라설 때 자신의 옆에 있을 사람을 떠올리면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강인한 생명력과 끈기를 지닌 이가 바로 당신일 수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만주사변이나,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위원회(반민특위) 같은 역사 관련 용어들이 막무가내로 들이닥친다. 박정희 대통령의 등장까지 이어지는 시대 흐름이 다소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600페이지라는 널따란 도화지에 가볍게 얹혀있으니 그리 거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야 너두’ 벽돌책 돌파할 수 있어! 눈물을 흘리는 지도 모르면서 술술술 읽고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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