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프랑켄슈타인)
외로움을 모르는 자, 사랑에 대해 논하지 말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소설 속 캐릭터에 빙의해 이 따위 명령을 내리는 나란 인간. 책에 단단히 빠진 모양이다. SF의 고전,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추천받았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온갖 과학 공부를 하다 하다 마침내 인간을 닮은 생명체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고, 그 괴물이 던진 불행에 휘둘리는 내용의 이 소설. 대단하다. 소설은 한 마디로 인간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적막 같은 괴물의 삶이 얼마나 갑갑했을지 상상하게 하면서 무엇이 인간을 인간 이도록 하는지 사유하게 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각고의 노력 끝에 괴생명체를 창조해 냈지만 흉측한 외모가 살아 움직이자 절망에 빠지다 못해 그를 방치하고 만다. 초반에 나는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 소설의 전부인 줄 알았다. 거대한 육체의 괴물이 아무리 선한 행동을 해도, 예를 들면 위험에 빠진 아이를 구해줬음에도 생김새만으로 배척당하는 장면에서 안타깝고 애가 끓었다. 작품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는 과학 발전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고로 읽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또는 1800년대 기술 발전으로 일자리를 뺏긴 이들의 기계 파괴운동 즉 러다이트에 대한 논평으로 읽을 수도 있다.
나에겐 괴물이 느낀 고립감이 가장 크게 와닿았다. 인간은 절대 혼자서는 살 수 없으니까. 괴물은 창조자에게 버려졌을 때 어쩌면 그것이 어떤 의미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숲속에 은거하는 드 라세 가족의 모습을 통해 인간 사회에 대해 배우게 됐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나 존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연결’이라는 개념을 체득한 것이었다. 사회화 과정이었다.
그로 인해 괴물은 절대 고독에서 벗어나 자신도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을 품게 됐다. 박사를 찾아와 자신을 사랑해 줄 여성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 나는 십분 이해되었다. 이 부분을 읽으려고 이 책을 만난 것 같았다. 그것은 양육자에게 나를 굶기지 말고 보살펴 달라는 갓난아기의 요청과 다름없었다. 이후에 ‘사랑받을 수 없다면 공포의 근원이 되겠다’는 괴물의 협박이 나올 때는 애석하고 서글펐다. 그로 인한 박사의 고뇌 또한 보는 내내 구슬펐다.
소설은 문장 하나하나가 압도적이었다. 괴물의 존재와 그의 악행으로 괴로워하는 프랑켄슈타인의 감정 묘사가 이 소설의 팔 할이라고 한다면 나는 작가의 필력에 매혹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돌풍이 눈사태처럼 휩쓸고 내 영혼에도 일종의 광기 같은 것을 불러와 이성과 사고의 경계를 모조리 파괴했지” 같은 문장을 읽을 때면 분노한 괴물에게 이입해 가슴이 아려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화조차 문어체여서 좋았다. 연극적인 느낌이 들었다. 여러 출판사 가운데 ‘앤의 서재’ 덕분에 더욱 빠져들 수 있었던 것 같다. ‘네 놈의 결혼식 날 밤 내가 함께 있겠다’라는 표현보다는 ‘그대의 결혼식 날 밤, 그날도 나는 그대 곁에 머무를 것이다’라는 식의 어투가 내 가슴을 잘 움직이게 했다.
또 주인공의 발이 닿는 스위스나 독일 등지의 자연 묘사 역시 훌륭했다. 심지어 나는 유적지나 산이 나올 때 ‘프랑켄슈타인 코스 1’, ‘프랑켄슈타인 코스 2’라고 이름 붙여 유네스코에서 문화유산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렇게 자연과 계절에 대한 나의 경외심은 점점 폭발적인 수준으로 치달았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측면에서 프랑켄슈타인이나 괴물이나 행복하고 평온하길 바라는 애잔한 마음은 커져만 갔다.
괴물이 반려자를 원했듯이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부모든 친구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은 경험 덕분에 자신이 가진 마음을 타인에게 나누고 산다. 가슴에 사랑이 없을 때야말로 진정한 사망 상태가 아닐까. 나는 사랑을 간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거라고 믿는다. “모든 인간이 제 가슴에 품을 반려자를 맞고, 모든 짐승이 제 짝을 찾는데, 나만 혼자여야 한단 말인가?” 괴물의 절규가 귓가에 계속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