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계절 (2)

변화는 언제나 조용히 온다

by 홍연

그녀가 조용히 한 발을 내디디자, 잠시 뒤를 따르던 보겸도 그녀의 옆에서 천천히 걸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특별히 나눠지는 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고요함이 서로의 존재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방식처럼 느껴졌고, 걷는 속도도 마치 오래전부터 익숙해진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수업까지는 아직 조금 여유가 있었고, 캠퍼스는 다가오는 축제를 앞두고 들뜬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길가에는 알록달록한 플래카드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리허설 중인 학생들의 목소리가 튀듯 흘러나왔다. 미처 조율되지 않은 소리들조차 이 순간에는 어울리게 들렸다. 그리고 그 사이를 누비는 학생들의 웃음소리는 봄바람보다 먼저 꽃잎처럼 흩날리며 이곳저곳을 메우고 있었다. 웃음은 공기 중에 둥실 떠 있었고, 그 덕분에 캠퍼스는 마치 한 편의 산뜻한 영화 세트장처럼 보였다.


보겸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한참을 걷다가, 마치 생각난 듯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벚꽃축제 간대, 애들.”



유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말의 맥락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가 말한 ‘애들’이 누구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제 밤, 단톡방에서 올라온 메시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다들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한 바퀴 돌자는 이야기. 각자의 일정이 끝난 뒤에 모여 축제 부스를 구경하자고 했던 그 제안이 떠올랐다.


보겸은 여전히 가볍게 걸음을 옮기며,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말을 덧붙였다.



“이따 수업 끝나고, 너도 갈 거지?”



그의 물음은 별생각 없는 듯한 톤이었고, 말끝에도 무게는 없었다. 다만 굳이 축제에 갈 생각이 없었던 유연은 그 말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저 친구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건넬 법한 그런 물음. 그러나 그 가벼운 말 한마디는 유연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멈추게 만들었다. 그녀는 발걸음의 리듬을 살짝 흐트린 채, 말 대신 앞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 쉴 새 없이 오가는 소리, 어디서든 쏟아지는 웃음과 활기.


이 모든 것들은 대체로 ‘즐거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유연에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녀에게 그건 어쩌면 너무 크고 거친 에너지, 마음속 여백을 채우기보다는 오히려 비워내는 감각에 가까웠다. 그래서 매년 돌아오는 캠퍼스 축제도 조용히, 멀리서 바라만 보거나 그냥 지나치는 편이었고, 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이 그렇게 흘러갈 예정이었다.


그녀가 아무런 대답 없이 걷자, 보겸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밤에 초청공연 있대. 이름 뭐더라… 세 번째 계절? 그 밴드가 온다던데.”



그 말이 끝난 순간, 유연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멈칫했다. 꼭 누군가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둔 기억을 조용히 꺼내들기라도 한 듯, 그녀는 몸을 굳히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 뭐라고?”



보겸은 별일 아닌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세 번째 계절. 그 밴드, 알아?”


그의 입에서 밴드 이름이 다시 흘러나오는 순간, 유연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커졌다. 마치 오래된 꿈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



“헐, 진짜?! 그 밴드 진짜 온다고?! 거짓말… 아니 어떻게…! 와, 나 걔네 진짜 좋아하는데! 진짜 완전 팬인데!!!”



그녀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반짝이며 손끝을 허공에 뜬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치 들뜬 마음을 어디에도 고정하지 못하고 허공에 흩뿌리고 있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횟수는 셀 수 없었고, 말끝마다 감탄사가 붙었다. 얼굴은 순수한 설렘으로 환히 밝아졌고, 감정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나 앨범도 사고, 밤마다 라이브 영상 틀어놓고 자! ‘먼지를 닮은 하루’ 그 노래 알지? 진짜 눈물 나, 진짜… 와, 대박이다.”



그녀의 말은 마치 한 줄기 물처럼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어딘가 억눌려 있었던 감정이 입술을 통해 쏟아지듯 터져 나왔고, 그녀는 그걸 막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깊은 곳의 설렘을 여과 없이 드러낸 그 모습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보겸은 그런 유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덧붙이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를 따라가던 그는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살짝 어이없지만, 한편으론 기분 좋은 놀람처럼 보이는 웃음이었다.



“야, 너 이런 리액션 처음 보는데?”



유연은 그제야 자신의 흥분을 의식한 듯, 말끝을 흐리며 조금은 쑥스러운 얼굴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런가? 나 좀… 놀랐나 봐.”



보겸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좀이 아니라 많이. 근데, 너 웃으니까 딴 사람 같다.”


그 말에 유연은 순간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굳이 그 감정을 감추려 하진 않았다. 그런 마음이 있는지도 몰랐다는 듯, 그저 조용히 웃고 있는 보겸을 힐끗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스며든 미소는 아직 지워지지 않았고, 그 웃음을 본 보겸 역시 함께 미소 지었다. 서로의 감정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닮아가는 순간이었다.


그때, 캠퍼스 위로 흩날리던 벚꽃이 또 한 번 두 사람 사이로 떨어졌다. 흐드러지는 꽃잎들 사이로, 유연은 마음 어딘가에서 무언가 작고 가벼운 소리가 튀는 걸 느꼈다. 아주 작고 조심스럽지만, 명확한 기척이었다.


그건 생각보다 즐거운 느낌이었다. 설렘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너무 미묘하고, 감정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감촉이었다. 어쩌면, 그 날 그 시간, 그저 지나갈 줄만 알았던 축제의 하루가, 유연의 마음 한 귀퉁이를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바꿔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애써 감추고 있었던 마음, 들키지 않기 위해 꼭꼭 싸매 두었던 감정이 이제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빛이 있는 바깥으로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이렇게 조용히, 아무 일도 아닌 듯한 순간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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