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아닌
바닥은 온통 꽃잎이었다.
이른 아침의 햇살에 반사되어, 마치 시간이 흘러내린 자국처럼 고요히 깔려 있었고, 사람들의 발길이 채 닿기 전부터 이미 이 길은 누군가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의미도 담기지 않은 듯한 정적 속에서, 들리지 않는 속삭임처럼 잎들이 바닥을 덮고 있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이고 일어난 아침 햇살은 바람을 따라 그 잎들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고, 그 반사된 빛은 마치 시간이 흘러내리다 바닥에 고여버린 듯한, 은은하고도 쓸쓸한 빛깔로 길을 물들였다. 바람조차 머뭇거리는 듯 고요한 그 길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기도 전부터 이미 누군가의 지나간 감정들로, 그리고 오래도록 되뇌어진 기억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그 길을 천천히 걸어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의 꽃잎들이 소리 없이 흔들렸고, 어떤 건 발끝에 스치며 부서졌다.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그저 걸었다. 무언가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라, 무언가에서 멀어지기 위해 걷는 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끝에, 그녀는 멈춰 섰다. 갑작스럽게 무게를 잃은 듯, 바람이 불기도 전인데 그녀의 어깨가 조용히 떨렸다.
정적은 무심하게 그 자리를 감쌌다. 아무런 의미도 담기지 않은 침묵 속에서, 그녀는 마치 시간을 잠시 멈추고 있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런 그녀의 주위로, 바닥을 덮은 잎들이 마치 귓가를 간질이는 낮은 속삭임처럼 조용히 파문을 일으켰다. 들리지 않지만 존재하는 소리, 보이지 않지만 감지되는 감정처럼.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바람이 불었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숨결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오래 전 멈춘 대화의 여운 같기도 했고, 미처 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온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 바람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사람처럼 거세졌고, 바닥에 고요히 누워 있던 잎들을 하나둘 일으켜 세웠다.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춤과도 같았지만, 동시에 밀려나듯 휘청거리는 어떤 이별의 몸짓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잎은 허공을 그리다가 서로 부딪혔고, 어떤 잎은 방향을 잃고 제자리를 맴돌다가 바람의 결에 떠밀려 사라졌다.
그녀는 말없이 그 모든 흐름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한 장의 꽃잎이 조심스레 그녀의 발끝에 다가왔다. 그러다 이내 바람에 밀려 천천히 멀어졌다. 그 잎의 움직임 속에는 오래된 망설임이 담겨 있는 듯했고, 다시는 닿을 수 없는 감정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금 스쳐 지나간 그 한 장의 꽃잎이 마치 어떤 말처럼 느껴졌던 것이다—한 번 입 밖에 나왔지만 끝내 머물지 못하고, 제 주인을 떠나 허공을 맴돌다 이내 사라져버리는 말.
네가 불행하길 바래.
이상하리만큼 그 말은 잎보다 오래 머물렀다. 바람보다 더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었고, 이내 조용히 그녀를 무너뜨렸다. 그녀는 그 문장을 수없이 되뇌었다. 어떤 날은 그것이 단순한 저주처럼 느껴졌고, 또 어떤 날은 그 말이야말로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라는 건, 입을 떠나는 순간부터 본래의 뜻을 잃는다. 누군가의 귀에 도착하기 전까지, 말은 수많은 감정과 기억 속에서 부서지고, 다시 조각난다. 결국 말은 말의 형태로 기억되지 않고, 그 말이 들렸던 순간의 공기, 목소리의 떨림, 말하고 난 후의 침묵 같은 것들로 기억된다.
그래서 그는 그 문장을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잊지 못했다.
눈앞에서 흩날리는 벚꽃잎은, 어쩌면 그녀의 마음이었다. 바람이 스쳐간 자리마다 달라붙었다가 떨어지고, 고요한 곳에 이르러도 끝내 안착하지 못하는 감정들. 그녀는 그런 마음을, 차마 꼭 쥐지도, 흘려보내지도 못한 채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목울대를 맴돌다가, 끝내 바람에 쓸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 봄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에서도, 그 길 위에서도.
그녀는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벚꽃잎이 다 지고 나면, 그만큼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그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에게 천천히 물음을 던지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 아주 희미하게 바람의 결이 바뀌는 듯한 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아주 작고, 그러나 분명하게—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유연아.”
낯익은 목소리였다. 하도 오랜만이라 순간적으로 잊고 있었지만, 종종 강의실에서, 학식 줄에서 스치듯 들었던, 낮고 담백한 목소리. 백유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다시 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다르게. 아래에서 위로, 마치 무엇인가를 들어 올리려는 듯한 방향으로. 바닥에서 조용히 누워 있던 꽃잎들이 다시금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나뭇가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잎들까지 꽃비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꽃잎 너머로 권보겸이 걸어오고 있었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친 채, 무심한 듯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은 그 어느 계절보다도 느긋해 보였고, 하늘에서 흩날리는 벚꽃잎들은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그의 걸음을 따라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문득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꿈이 아니라 어딘가 마음 깊은 곳에서 낡은 문 하나가 조용히 열리는 소리 같았다. 무언가 오래된 것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하는 느낌.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 유연은 자신도 모르게 아주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잎이 흩날리고, 누군가가 걸어오고, 지나간 계절이 뒤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이, 아주 작고 조용한 시작이었다는 걸.
꽃잎이 천천히 흩날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건 분명 같은 벚꽃인데, 방향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모든 게 낯설어 보였다.
유연은 보겸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말없이 서 있었다. 빛이 틈새를 파고들며 그를 감싸 안았다. 웃는 얼굴이 익숙한 동시에 낯설게 느껴졌다. 아마 그건 꽃잎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연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꽃잎 사이를 헤치고 다가오는 그의 걸음,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 어딘가 미세하게 어긋난 공기.
“여기서 뭐 해?”
보겸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가벼웠다. 무심한 듯 부드럽고, 별생각 없이 뱉는 듯하면서도 말끝에 어딘가 웃음이 걸려 있었다. 유연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가다듬은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고개를 아주 천천히 저으며 대답했다.
“그냥… 걷다가 멈췄어.”
보겸이 그녀 앞에 다가서며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아침부터 감성 충만이네?”
유연은 억지로라도 웃어야 할 것 같아서,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아침 햇살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이 가벼워졌기 때문일까. 여전히 그의 얼굴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아니, 어쩌면… 아직 내려오지 않은 꽃잎 하나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슬쩍 시선을 피하는 유연의 옆에 보겸은 아무렇지 않게 섰다.
두 사람 사이에 바람이 한 번 더 지나가고, 바닥에 깔린 잎이 슬쩍 몸을 말았다가 다시 눕듯 내려앉았다. 유연은 말없이, 그 풍경을 지켜보았다. 알 듯 말 듯하게 무언가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