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웃고 있었지만
강의실 앞자리, 창가 쪽에 앉은 유연은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햇빛이 슬쩍 번져 있는 책상 위엔 따스함이 고여 있었고, 유연은 그 위로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손끝에 닿은 온기가 오늘따라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뒷자리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보겸이었다.
소곤소곤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였을 테지만, 유연의 귀엔 그 중 몇 음절만이 또렷하게 들렸다가 이내 멀어졌다. 귓가를 스친 그 짧은 파장이 유연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었다. 교수님의 수업이 시작되고, 유연은 펜을 들었다. 익숙한 제스처였고, 오랜 시간 해오던 동작이었다. 하지만 펜을 쥔 손이 오늘은 조금 느리게 움직였다.
칠판을 바라보려 애썼지만, 눈동자는 자꾸만 흩어졌고, 머릿속은 말갛게 비워진 듯 하면서도 어지럽게 떠돌았다. 문장을 따라가지 못한 채, 유연은 점점 안으로 가라앉았다. 교수님의 목소리는 들리고 있었지만, 말끝마다 울리는 소리가 이따금 멀어져갔다. 바로 앞에서 들리는 소리인데도,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뿌예졌다가 희미해졌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 분명 유연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한 발 늦게, 아니 여러 발 멀찍이 뒤에 떨어진 채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손끝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책 귀퉁이, 수업 필기 대신 작은 선과 곡선이 피어났다. 아무 의식 없이, 그러나 명확한 방향으로 번져갔다. 꽃잎처럼 가볍고 바람결처럼 흐르는 선들 사이로 글씨가 하나둘 튀어나왔다.
잊어야 하는 계절에, 자꾸 네가 피어나
내가 웃은 날보다, 울지 않은 날이 더 그리워져
자신도 모르게 써내려간 그 문장 앞에서 유연은 펜을 멈췄다. 손을 멈추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창밖을 바라봤다. 그곳엔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가지 끝이 자꾸 떨렸다. 분명 바람일 텐데, 왜 그 떨림이 마음의 움직임처럼 느껴졌을까.
유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햇살은 따뜻했지만, 마음 한편엔 찬 기운이 잔잔히 번져갔다. 그 따뜻함과 서늘함 사이에서, 유연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아주 작은 숨이었다. 누군가 듣지 않으면 지나칠 정도로 작고 조심스러운 숨. 하지만 그 숨결엔 무너져버릴 것 같은 감정 하나가 고여 있었다. 그 순간, 유연은 깨달았다. 지금 이 교실 안에서 가장 흐트러져 있는 건 칠판의 글자도, 교수님의 목소리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걸.
강의실 문이 열리자, 따사로운 봄 햇살이 밀려들었다.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삼삼오오 강의실을 빠져나갔고, 유연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매려는 찰나, 보겸이 어깨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가자. 다들 정문 쪽에서 기다린대.”
“응, 알겠어.”
두 사람은 함께 복도를 걸어 나왔다. 복도 창문 너머로 흐드러진 벚꽃이 햇빛에 반짝였고, 벚꽃잎이 바람에 날려 교정 바닥에 소복하게 쌓이고 있었다. 유연은 그런 풍경을 슬며시 바라보다 보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 앞에는 보겸의 친구들이 이미 모여 있었고,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자 반가운 인사들이 오갔다.
“유연이도 왔네!”
“진짜 날씨 미쳤다 오늘. 완전 축제 날씨야.”
그렇게 다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캠퍼스 곳곳엔 축제 부스들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었고, 그 사이를 학생들이 바글바글 채우고 있었다. 솜사탕 기계가 돌아가고, 옥수수 버터구이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동아리마다 개성 넘치는 이벤트를 열고 있었고, 유연은 소란스러운 축제 분위기에 천천히 몸을 맡겼다.
“이거 먹어봐. 진짜 맛있대!”
보겸이 닭강정 한 컵을 건넸다.
“오... 근데 왜 내 걸로만 매운맛을 골랐어?”
유연이 한 입 먹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겸은 웃으며 물티슈를 꺼내 건넸다.
“괜찮아. 매워야 제맛이지. 얼굴 귀여워질걸?”
친구들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깔깔 웃었고, 누군가는 아이스크림을 사다 나눠주며 "입에 불났지? 이걸로 진정하라"고 장난쳤다. 유연은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었고, 어느새 마음도 편안해졌다.
길가엔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어주는 체험 부스도 있었고, 캠핑 의자와 탁자가 놓인 포토존도 있었다. 누군가가 네 컷 사진 부스를 발견하고는 다 같이 사진을 찍자며 손을 흔들었다. 좁은 칸 안에 여럿이 들어가 머리를 맞대며 사진을 찍었다. 보겸이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유연은 그 옆에서 웃음을 참느라 입을 틀어막았다. 사진이 인쇄되는 동안, 기계 앞에 모여서 서로의 얼굴이 어떻게 나왔는지 기대 섞인 탄성을 터뜨렸다.
“야, 이거 봐. 보겸이 완전 망했어!”
“아니야, 나 일부러 그런 거야. 예술이야, 예술.”
모두들 웃고 떠들며 다음 부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유연도 그 속에 있었지만, 잠시 뒤를 돌아보는 순간, 군중 속 어딘가에서 한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흰 셔츠에 어깨선이 익숙했다. 걸음걸이, 뒷모습. 그 모든 것이 건욱과 너무 닮아 있었다. 가슴이 잠깐 철렁였다. 유연은 무의식적으로 발을 멈췄다. 마치 오래된 필름을 덧입힌 것처럼, 몇 초 동안 눈앞의 풍경이 멈춘 듯했다. 하지만 친구들의 목소리가 그녀를 다시 현재로 데려왔다.
“유연아! 저쪽에 떡볶이 진짜 맛있대. 가자!”
“응...! 금방 갈게!”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 그 뒷모습은, 아마도 그냥 낯선 사람이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해가 천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노을빛이 하늘에 번지며 붉게 물들었고, 축제 현장은 점점 더 활기를 띠었다. 학교 중앙 잔디밭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어느새 무대 앞에 멈춰 섰다.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자리를 잡고, 하나둘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슬슬 공연 시작하려나?”
“응, 지금 세팅하는 중이래. 곧 MC 나올 거야.”
보겸이 유연 옆에 앉아 작은 음료 캔을 건넸다.
“이거 네가 좋아하던 거.”
유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음료를 받아들었다. 사람들의 소음 속에서도, 어느새 하늘은 완연한 어둠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축제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