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머문 자리
무대 아래, 유연은 조심스레 앞자리 쪽 관객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저 ‘좋아하는 밴드 공연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단순하고 조용한 기쁨 하나를 품은 채,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다.
주변은 들뜬 기운으로 가득했다. 곳곳에서 터지는 웃음소리, 셔터 소리, 휴대폰 플래시의 번쩍임, 그리고 무대를 가득 채우는 음악의 진동. 그 모든 것이 축제처럼 붐볐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마치 혼자만이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조용히, 자신만의 리듬으로 공연을 맞이하고 있었다.
공연과 공연 사이의 짧은 공백, 무대 위로 올라온 MC가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관객들의 분위기를 다시 끌어올렸다.
“자, 지금부터 아주 짧은 깜짝 이벤트를 해볼게요! 여기 귀여운 노란 니트 입은 분, 앞에 계시네요? 남자친구 있으세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대 위의 조명이 한 줄기 빛이 되어 그녀를 정확하게 비추었다.
얼떨결에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인 유연은 당황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주변을 재빨리 살피는 그 순간, 관객석의 여기저기서 터지는 웃음과 환호. MC의 장난기 어린 손짓에, 그녀는 마치 어떤 물결에 휩쓸리듯, 무대 위로 이끌려 올라갔다.
그 순간부터 시간은 이상하게도 무겁게 느려졌다. 말은 들리는 듯, 들리지 않았고, 눈앞의 장면들은 마치 흐릿한 수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 분이요, 지금 남자친구 없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혹시... 이 분과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 우선 저희가 직접 한 분을 불러볼게요!”
카메라가 관객석을 천천히 훑었다. MC의 손끝이 어느 한 지점을 향해 멈췄다.
“저기, 후드 뒤집어쓴 남학생! 맞아요, 본인이에요! 친구분들이 왜 이렇게 반응이 좋아요? 얼른 나와주세요~!”
무대 조명 아래로, 친구들의 장난스런 손에 떠밀리듯 한 남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스꽝스럽게 웃으며 나아오는 실루엣. 유연은 무심코 웃으려 입꼬리를 올리다말고 그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 웃음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박건욱.
전 남자친구.
한때, 사계절을 함께 보냈던 사람.
그리고 마지막 순간, 차갑게 등을 돌리며 ‘네가 불행하길 바란다’고 말했던 사람.
그 이름 하나가 불러온 감정은, 숨이 턱 막히는 충격으로 그녀를 내리눌렀다. 무대 위의 조명은 여전히 밝았고, 관중들의 함성은 계속해서 울렸지만, 그녀의 귓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은 마치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듯 느리게 내려앉았고, 가슴 언저리 어딘가가 뾰족하게 쿡, 하고 찔려왔다. 그리고 천천히, 묵직하게, 아픔이 스며들었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고, 두 다리는 무게를 잃은 듯 미세하게 떨렸다.
건욱 또한 그녀를 본 순간 동작을 잠시 멈춘 채 숨을 들이쉬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들의 거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표정을, 숨소리를, 눈빛의 떨림을 알아챌 수 있을 만큼의 거리. 그리고 그 거리 속에서 유연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왜 지금, 왜 하필 여기서…’
그녀는 자신이 서 있는 무대 위에서 조용히, 아주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벚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듯,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렇게, 가볍게, 그러나 돌이킬 수 없게.
MC는 아무것도 모른 채 흥을 돋우었다.
“자! 우리 여기 무대 위에 귀엽고 예쁜 여학생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 분에게 관심 있는 분, 솔직하게 손 한번 들어볼게요!”
MC의 말에 다시 한 번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무대 위에서 건욱과 유연, 둘만이 마치 흑백으로 존재하는 듯 미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 나는 무대 위에 이 친구보다 내가 낫다! 손 들어 볼까요? 하나, 둘, 셋!”
그 순간, 관객석 중간쯤에서 조용히, 아주 조심스럽게, 한 손이 올라갔다. 바로, 권보겸이었다. 유연은 그 손이 천천히 올라가는 걸 봤지만, 그 의미를 곧바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저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 안에서 출렁이는 무언가를 조용히 느낄 뿐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건욱이라는 이름이 아직도 자신의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었고, 보겸이라는 이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MC는 흥에 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자~ 방금 손 들었던 남학생들! 무대로 모셔볼게요!”
환호성과 야유가 뒤섞인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몇 명의 남학생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고, 그들 사이엔 보겸이 있었다. 유연은 입술을 꼭 깨물고 무대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 그러나 낯선 상황, 예상하지 못한 감정들 사이에서, 그녀는 자꾸만 흔들리고 있었다. 건욱의 존재감은 여전히 그녀에게 너무나 선명했고, 그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공기 자체가 묵직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자, 이 여학생, 어때 보여요? 첫인상부터 이야기해볼까요?”
마이크가 차례로 돌아가며, 남학생들은 짧은 말로 유연에게 말했다.
“귀여우신 것 같아요.”
“진짜 제 스타일이에요.”
“눈빛이 예뻐요.”
웃음과 박수, 떠들썩한 리액션이 쏟아졌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녀에겐 멀게만 느껴졌다. 유연은 단 한 번도 정면을 응시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로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 속에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자기소개를 요구하며 마이크가 건네졌을 때, 유연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술을 떼듯 중얼였다. 그 후로 마이크가 전해질 때마다 그녀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유연..이고요. 잘 모르겠어요…”
“당황스럽네요…”
“그냥… 별로 생각 안 해봤어요…”
그 목소리는 떨렸고, 그 말들조차도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변명처럼 들렸다. 그녀는 지금, 무대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억 속 어디쯤에 발이 빠져 허우적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MC의 마지막 질문이 떨어졌다.
"자, 이 여학생과 밥 한 끼 먹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다 싶은 분, 지금 손 들어주세요.“
잠깐의 조용한 정적. 그리고 그 정적을 깨듯, 두 개의 손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하나는 보겸. 그리고 또 하나는 박건욱이었다.
환호가 터졌고, MC는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와~ 분위기 심상치 않은데요? 우리 유연 학생, 이제 선택의 시간이 왔습니다. 두 사람과 눈 마주쳐보시고, 밥 한 끼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해주세요.“
그 순간, 유연의 마음 한가운데에서 조용하지만 확실한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누군가 아주 깊은 곳을 꾹, 눌러오는 듯한 묵직한 아픔. 건욱은 여전히 예전과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차분하고, 단정하고, 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눈빛. 수없이 반복해 봤던,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긁어내는 그 표정.
보겸은 그저 조용히 서 있었다.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따뜻했고 조심스러웠다. 유연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손이 맞닿는 순간 관객석에서 터진 환호는 멀게만 느껴졌고, MC의 장난스런 멘트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두 분 오늘 밥 꼭 드세요~!“
보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어색하게 웃었고, 유연의 손을 붙잡고 무대 아래로 서둘러 내려왔다. 그 손은 따뜻했다. 불빛과 소란이 멀어지는 그 짧은 이동 속에서 유연은 겨우, 정말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뒤로, 무대 위에 남겨진 박건욱은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슬픔인지, 후회인지, 아니면 다시 움트는 미련인지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지만, 그 안엔 분명 말하지 못한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그리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감정들이 잔잔한 파문처럼 번지고 있었다.
이끌리듯 무대를 내려가던 유연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건욱과 눈이 마주쳤다. 그 찰나. 그의 눈동자에 담긴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어딘가를 또 한 번 찌르듯 아프게 스쳤다.
그러나 그녀는 그 감정을 조용히 삼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주 조금,
그의 손을 잡고 걷는 걸음을…
느리게, 더디게, 옮겼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