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크업 실장을 잃은 원장은 전화해도 만나주지 않는 그녀에게 실연당한 사람처럼 보였다.
수없이 울리는 전화벨소리를 허공에 날릴 뿐 그녀는 끝내 받지 않았다.
원장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집 앞까진 찾아갔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길 잃은 강아지처럼 왔다 갔다 정신없이 방황하던 원장이 내게 전화했다.
"정 매니저, 나 바로 앞 커피숍에 있어. 잠깐 나와줘."
혼자 커피 한 잔을 두고 멍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그동안 휴지 칸 수를 세며 버럭거리던 폭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힘없는 여자일 뿐이었다.
"원장님 많이 힘들어 보이세요..."
"내가 그동안 실장을 너무 믿고 있었나 봐."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한숨이 섞여 있었다.
"사실 난 미용만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웨딩이나 영업에 관한 건 잘 몰라.
그래서 똑똑한 그 애가 어리지만 일적으로는 언니 같고 선배 같아서 많이 의지했었지.
당장 메이크업 실장을 다시 구한다 해도 웨딩컨설팅을 어떻게 해야 하고, 상담이며 영업할 일이 막막해.
숍에서 이런 모습을 직원들에게 보이는 것도 싫고, 마음은 답답하고..."
명령과 경멸만이 그녀가 가진 언어인 줄 알았는데,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그녀에게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권위의 가면 뒤에 숨어 있던 연약한 그녀 모습이 싫지 않았다.
"원장님, 떠난 사람에 대한 미련은 빨리 버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당분간 메이크업실 일은 팀장님께 부탁하고, 웨딩 상담과 거래처 영업은 제가 맡아서 해볼게요."
나를 바보 취급하던 그녀를 왜 돕고 싶었을까.
스물일곱, 나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야무지지 못했다.
그저 보이는 대로 믿는 순진함이 더 앞서는 나이였다.
"정실장은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할 수 있겠어?"
"그동안 어깨너머로 배웠으니 잘하지는 못해도 하다 보면 실력이 늘지 않을까요?
당분간은 제가 상담할 때 원장님이 옆에서 코치해 주시면 되죠."
그녀를 위로하고 싶어서 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난 잘할 자신이 있었다.
나라고 상담하고 영업하고 못할 게 뭐 있을까 싶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원장은 나를 보며 약간의 희망이 보이는 것처럼 살짝 웃어 보였다.
숍으로 함께 걷던 그녀의 얼굴은 방금 전까지 실연당한 가여운 얼굴이 아니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희망과 기쁨에 설레는 얼굴이었다.
보기보다 단순하고 의지하고 싶어 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다짐했다.
앞으로 그녀를 제대로 모셔야겠다고.
어쩌면 인간적인 사람일지 모른다고.
나는 이제부터 시키는 일만 하던 수동적인 생활에서 능동적인 일을 할지도 모른다.
심부름만 하던 나도 책임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원장은 내게 경멸 대신 신뢰하는 눈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명령이 아닌 의논과 공감받는 대상이 되니 나는 달라지고 싶었다.
하녀가 아닌 사원으로. 이 회사에 충성을 다하고 싶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소속감마저 느꼈다.
그날 이후부터 원장은 더 이상 길 잃은 강아지처럼 굴지 않았다.
첫 상담을 하는 나를 지켜보며 상담실 앞에서 그녀는 분명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메이크업 실장을 찾지 않았다.
상처는 때로 새로운 관계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그날 커피숍에서 만난 것은 절망에 빠진 사장과 직원이 아니라, 서로의 진실한 모습을 처음 마주한 두 사람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