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웃었고 깊게 남았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데는
대단한 사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나와 그 사람은 특별한 약속을 하지 않았고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는 바빴고 , 나는 아직 학생이었고
시간은 늘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어느새
내 하루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름이 되었고
하루에 있었던 사소한 일 하나쯤은
꼭 말해주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휴가를 나온 군인이었고
나는 방학 숙제를 미뤄둔 고등학생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계절보다 먼 간격이 있었지만
그 사이에서 우리는 말조차 천천히 꺼냈지만
그 느린 속도 안에서
마음은 조금씩 가까워졌다.
전화는 길지 않았지만
"오빠! 오늘 뭐 했어? "
"나는 학교에서!!... "
그 짧은 문장들 사이에
서로의 하루가 조용히 놓였다.
그는 늘 밝았다
장난도 잘 치고
말끝에 웃음을 달고 살았다
"오빠 이 정도면 , 최고지?"
그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면
그는 또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이쁘게 잘 커 알았지? "
그 말이 어찌나 설렜는지
어찌나 좋았는지 모른다
지금 돌이켜보면 뻔하디 뻔한
플러팅 정도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 한마디에 20대의
생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외동딸이었던 나는
부모님이 엄격한 규칙아래 살고 있었다.
통금은 당연했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더 많은 세상이었다
그래서 더 뭔가를 해보고 싶었다
그게 뭐든
어떤 순간에는 마음이 벽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 안에 갇힌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옆이면
내가 조금 더 편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어린 내가
어른 흉내를 내지 않아도 되는 곳
잘 몰라도 괜찮고
조금 서툴러도 웃어넘겨지는 자리
그는 나를 앞서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내 속도에 맞춰 옆에 서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란 감정이
두근거림보다 먼저 "안도"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걸
그 사람을 통해 배웠다.
그저 오늘 연락했고
오늘 웃었고
오늘도 괜찮았다.
그렇게 하루가 쌓였고
그 쌓인 하루들이
어느새 "우리"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아마 그때의 나는 몰랐을 것이다.
이 평범한 나날들이 얼마나 큰 사랑으로 남게 될지를
다만 확실한 건
그 시절의 나는
무서울 만큼 많이 좋아했고
아끼는 법도 몰랐고
그저 온마음으로 웃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에서야 안다
그때 그렇게 좋아해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이
앞으로의 나를 끝까지 살아가게 할 힘이 될 거라는 걸
사랑은 처음부터 거창하지 않았다.
다만
매일의 끝에
"오늘도 이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조용히 시작되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