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이기적인 것이 가장 이타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사실은 그런 면에서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유전자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폐를 끼친다'는 말로 타인과의 연결을 끊어버리는 문화는 행복과도 등을 돌리고 있다.... 더욱 제멋대로가 되어 타인의 신발을 신어볼 일이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브래디 미카코/p192)
얼마 전 한 독서모임에서 이야기해 보고 싶은 문장으로 발췌했던 부분이다.
우리는 극도로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선을 넘지 않으려고 매사에 조심하며 살아간다. 전에 읽었던 <서영동 이야기>라는 책에서 '교양 있는 서울 시민 희진'이라는 목차가 기억에 남았다. 교양 있는 서울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정지아 작가 북토크에서 작가님께서 유머러스하게 말씀하신 게 생각난다. 작가님은 도시에서 살 때 말 그대로 '서울깍쟁이' 였다고 하는데, 구례에서 살면서 많이 변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여러 가지 사례들 가운데... 처음 구례에 내려갔을 때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이... 시골 분들은 "거기 누구 없는가?" 하고 물으면 이미 한 발이 방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선을 넘어오는 사람들...
'관계'라는 것이 사실은... 서로의 선을 어느 정도 넘어야 시작되고 가능한 것 아닐까?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우리는 '관계'의 가능성마저 잃어버리고 서로 겉으로의 예의만 차리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달콤한 노래>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고민에 빠졌던 부분이었다. 관계의 선을 넘다가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고 마는 보모... 아마도 그 선을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넘었던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보모로서 돌봄의 역할을 하면서 돌보는 가족에 대해 필요 이상의 감정이 생겨버렸지만, 그 가족에게 보모는 단순히 '필요해서 고용한 능력 있는 보모'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 책 토론 때도 보모에게 그런 마음이 생긴 것은 돌봄의 과정에서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는 일이고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의문이 들었는데 누군가 '선을 넘지 말았어야죠'라고 말했다.
살아오면서 스스로도 그동안 점점 더 선을 넘지 않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던 것이 아마도 보모처럼 일방적인 선 넘기가 될 것이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일방적인 선 넘기가 되었을 경우, 내가 받게 될지도 모르는 상처를 사전에 미리 보호하고 방어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관계의 가능성과 감사했던 일들은 상대방에서도 어느 정도 선을 넘어왔기 때문에 생겨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선을 넘어오는 그것이 받아들여지려면 내 마음 또한 열려 있어야 했을 것이고... 극히 일부가 받아들여지긴 했겠지만, 아마도 선을 넘어오는 대부분의 것들은 나도 의식조차도 하지 못한 채 거부해 왔을지도 모른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전화 걸기'이다. 무언가에 몰두하고 집중하고 있거나 바쁠지 모르는 상대방에게 갑자기 불쑥, 나를 들이미는 일... 이것이야말로 '선을 넘어야 하는 일', '나도 모르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 같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의 기준에 대해 각자가 느끼는 정도는 다를 것이다. '전화 걸기'까지 선 넘는 일로 생각하여, 폐를 끼치게 될까 봐 미리 염려하여 전화하지 못한다면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을 전혀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선을 넘지 않으려는 마음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과 같은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폐를 끼친다'는 말로 타인과의 연결을 끊어버리는 문화는 행복과도 등을 돌리고 있다"라고 하는 말에 대하여 뒤집어 이야기하면, 선을 넘어야, 폐를 끼쳐야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가끔 아무 생각 없이 선을 넘고 훅 들어오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관계는 풍성해지는 경우들이 있는 것 같다.
오랜 습관으로 인해 나 스스로가 선을 긋고 있었음을 느낀다. 그렇게 관계는 이어지지 못하고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었음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러는 것이 '교양 있는 서울 시민'이고 쿨한 것이라 여겨왔던 것 같다. 그리고... 조금씩 선을 넘어오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배우기도 한다. 정지아 작가가 구례에서 사람들에게 배운 것처럼...
선을 넘지 않는 피상적 관계의 틀에서는 '기브 앤 테이크'의 교환 가치의 개념이 탑재된 거래 관계나 역할 관계밖에 남아있지 않을 거다.
<달콤한 노래>에서 가족들은 보모를 역할로만 보고, 인간으로 보지 않았는데... 보모는 그렇게 똑같이 선을 그었어야 할 관계의 정도를 넘어버려, 인간으로 보게 되고 마음이 생겨나고 사랑이 생겨나고... 집착이 생겨나고... 분노가 생겨났다. 돌봄의 역할을 하면서... 수행하고 있는 일 자체가 '엄마'가 하는 일 그대로인데 '마음'이 가지 않는다면 그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용된 보모일 뿐이라고 기계처럼 선을 그어 마음을 주지 말았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 그 선을 넘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가족이 그리스의 섬에 보모를 데리고 가면서 보여준 호의를 그쪽에서 먼저 선을 넘어온 신호라고 착각을 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보모가 아니라 가족의 역할만이 아니라, 진짜 가족이 되고 싶었던 그 마음이 나빴던 것인지는 계속 의문이다. 사실은 그런 마음이 지금 시대에 실종되어 가는 '진짜 인간의 마음'일 수도 있지 않을까?
가족이야말로 경계를 분명히 하고 선을 지키려다가 결국은...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접하게 되고, 그 모든 사람들을 인간으로 상대할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선을 긋는 관계에 익숙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을 넘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된 소설 속 많은 경우들이 생각난다. <제인 에어>도 가정교사였지만 역할 관계가 규정하는 선을 넘게 된 경우이지 않았나 싶다.
사실은 수많은 사랑의 가능성들은 선을 넘어야 생겨나는 것 같다. 연애라는 사건을 가로막고 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장벽이 어쩌면 '예의'일 수도... 그리고... 어렸을 때 그 수많은 '예의'에 대한 항목들을 탑재하지 못하고 어설펐기 때문에 젊은 시절 비교적 원 없이 연애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도 철벽을 치고 있었더라면 아무도 나에게 다가오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젊은 사람들이 쉽게 '연애'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켜야 할 '예의'의 항목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선을 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 이상의 관계로 이어지지 못하고 예의만 차리고 피상적 관계에 머무르기만 할 뿐인 것은 아닐지...
선을 넘어와 다가오는 그 마음이 내 마음에 이르려면 내 마음의 문도 조금은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독서모임을 통해, 글쓰기를 통해... 코로나를 거치며 더욱 굳게 닫혀버렸던 내 마음의 문도 그동안 아주 조금씩 열리지 않았나 싶다. 그 열린 틈으로 많은 마음들이 선을 넘어왔던 것 같다. 이전의 높은 기준으로 은연중에 '선 넘는다'라고 감지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상대에게 전화하지 못한 그 마음 그 자체가 나의 높은 기준이었던 것이기에, 결코 불쾌한 수준의 선 넘기가 아닌 관계의 연결을 위한 최소한의 선 넘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넘어와서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손잡아 준 수많은 마음들이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열리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열린 마음이 되어 지금 글쓰기까지 가능해졌을 것이다. 놀라서 화들짝 문을 닫아버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가와 준 그 마음들에 감사하다.
나의 높은 기준은 '글쓰기'마저도 선 넘는 일이라고 여겨왔던 것 같다. 글쓰기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키고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지, 내 마음속 감시자는 계속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데... 잣대를 내려놓고 조금씩 선을 넘어갔던 글을 좋게 보아준 마음들이 있었다. 그 마음을 나에게 전해주기까지 했던 그 선을 넘어온 마음들이 그동안 소심해있던 마음에 확실히 더 용기를 내어 문을 열도록 해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인정욕구'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꿋꿋한 척하지만... 조금씩 선을 넘어가는 그 마음이 벽에 부딪힌다면 금방이라도 좌절되어 문을 다시 꽁꽁 닫아버렸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인정받는 기쁨이 아니라... 다가가는 기쁨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음이 서로에게 가닿는 기쁨...
좋은 마음으로 넘어가는 선도 곡해되거나 차단되는 이유는, 나쁜 속마음으로 선을 넘어 다가오는 그 수많은 마음들에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귀가 얇은 편이었고, 세상의 모든 말에 다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떠드는 수많은 말들이 있었던 것이고, 그 말들에 지쳐 나는 모든 귀를 다 닫아버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그럴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나를 지키는 길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말에 휘둘리지 않을 확고함이 어느 정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공'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문을 닫고 '독서'에 몰입했다. 그리고 지금... 그때만큼 휘둘리고 정신이 없고 지치지 않는 것은 내 속에도 '내공'이 조금 쌓였기 때문이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그것이 편협된 나만의 고집이 된다면 결코 좋은 일은 아니겠지만...
글을 쓰다 보니 단순히 명명했던 '선 넘기'라는 것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고,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기에 혼란이 생겼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선을 너무 많이 넘어가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고, 스토커가 되고... <달콤한 노래>에서처럼 '살인'에까지 이르게 되면 큰일 나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무례한 선 넘기, 다른 목적을 위하여 좋은 모습으로 위장하여 다가오는 선 넘기 들을 차단하려다 보니 관계의 연결을 위해 꼭 필요한 선 넘기마저 차단하고 살지 않았나 싶다. 그리하여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책에서 저자가 더욱 제멋대로가 되어 '폐를 끼치고' 타인의 신발을 신어볼 일이라고 조언했나 보다.
아직은 '폐를 끼치는 것'까지는 어렵지만 '선 넘기'는 조금씩 연습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일 자체가 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일이라 사실은 인식하지도 못한 채 입으로는 '폐를 끼치지 않는다'고 자신하지만 늘 타인에게 폐를 끼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돕지 못했다'라고 하는 언해피한 기분에 어두워지지 않고 인생을 해피하게 보내고 싶다는 욕망이 인간을 이타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지당하다. 이타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은 상반되기는커녕 손에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브래디 미카코/p186)
"그래도 약간은 폐를 끼쳐도 되지 않아? 누구나 때로는 응석 부리고 싶어지니까. 남을 받아준다는 건 그 사람들도 당신을 받아줘야 한다는 뜻이고.
...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라는 일본만의 독특한 관념은 언뜻 남을 배려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남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실은 이 글에 쓰여 있는 대로 나도 남 때문에 귀찮아지고 싶지 않다는 심리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번거롭게 하는 일을 '나쁜 짓'이라고 하는 사회는 표층적으로는 타인을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하고도 엮이지 않고 '혼자서' 살아가는 인간 집단이다. 이것이야말로 'self-centered', 자기를 중심으로 한 세계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의 사회이며 그렇게 생각하면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말도 그리 이타적으로 들리지는 않는다."(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브래디 미카코/p196)
그래서 가장 이기적이었던 순간을 회상하며 가장 이타적인 순간을 떠올려보게 되었는데, 진심으로 이기적이지도, 이타적이지도 못하고 '선'을 의식했던 모습만 기억나며 예전에 폐를 끼친다는 것, 선을 넘는다는 것에 대해 적었던 글에 덧붙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