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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이세라 May 06. 2024

나의 아저씨

뒤늦게 '나의 아저씨'를 보고 있다.

10회쯤 보고 있는데, 지안이 처음으로 웃는 장면이 나오다가, 소리 내어 펑펑 우는 장면까지 진행된 상황이다.

그전에는 무감하게, 좀비처럼 그저 견디고 있는 모습...

지안의 어린 시절 모습이 나오고, 그 이후 지안이 펑펑 우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전까지는 찔러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굳은살이 배길대로 배겨 맞아도 아프다고 하지 않고 감정은 없이... 그건 살아 있는 생명의 본질에서 한참 멀어진 죽은 모습, 좀비 같은 모습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안을 조금씩 살아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차가운 세상에서 마치 기적처럼, 천사처럼 다가온 따뜻한 온기가 조금씩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며, 웃을 수 있는 사람으로, 눈물 흘릴 수 있는 생명으로 되살려놓은 것일까?

추운 겨울 동안 땅 속에 얼어붙어 있던 씨앗이 따뜻한 봄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 조그만 싹을 틔우는 것처럼 지안에게 조그맣게 웃을 수 있는 감정이 싹트지만, 새싹은 살기 위해 험난한 폭풍우도 견뎌내야 할 것이다. 이겨내면 죽음과 삶을 반복하며 커다란 나무로 성장해 가겠지만 그 과정에서 꺾여버리는 무수히 많은 생명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생명은 저마다의 생명을 치열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을 뿐. 삶과 죽음이라는 가능성, 또는 결과보다, 지금 살아 숨 쉬는 저마다의 생명으로 지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그렇게 주어진 생의 과정을 충실히 이행해 가며 자연 속에 내 본질과 일치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죽어있던 생명을 깨우는 것이 지안에게 좋은 일일까?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일까? 그런 고민은 현재의 내 질문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그 부분에 더 관심이 갔던 것 같다. 지안의 그 이후의 여정이 궁금하다.


아주 어릴 적... 지안은 '생의 기쁨'을 느껴보기도 전에 짓밟혀서, 그 이후로 고통에도 무감해지도록... 살아 있는 세포들의 생명력을 죽이고 겨우 숨만 쉬고 있을 뿐, 죽은 것처럼... 생의 에너지는 스위치를 꺼버린 채 유령처럼 살아가고 있었을 거다.

우연히 따뜻한 온기를 만나 생의 에너지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해 웃음을 되찾고 눈물도 되찾게 되었지만, 세상이 여전히 차갑다면... 매서운 겨울이라면... 잠시 만난 따뜻한 봄햇살에, 정말 봄이 왔고, 곧 여름이 올 것처럼 스위치를 다시 켜버리는 일은 어쩌면 지안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일지도 몰라서...


계절은 겨울로 향해가는데, 변덕스러운 가을 햇살을 봄 햇볕으로 착각하고 꽃을 피운 봄꽃들이 다시 매서운 겨울바람을 견디다 끝내 생을 마감해야 하듯이... 계절을 착각하여 꽃을 피우게 만드는 일은 과연 괜찮은 일일까?


하지만 봄꽃도, 가을꽃도, 계절을 착각해서 가을에 피어난 봄꽃들도... 어차피 죽음은 생명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숙명일 뿐...  어차피 죽을 것이기 때문에 꽃 피우지 않을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든 꽃을 피워야 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열매 속 작은 씨앗에 담아내어, 수많은 분신들로 대를 이어 생명을 지속하고, 나무는 겨울 동안 작은 죽음을 반복하며 다음 해에 다시 부활하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생명은 대를 이어 영원히 살아가고자 하는 것 아닐까...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생명으로서의 '나'일 뿐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대를 이어 생명을 지속하며 살아온 '나'인지도 모르겠다. 어제의 내가 밤 동안의 잠을 거쳐 아침에 새로운 태양과 함께 다시 부활하듯 깨어나듯이, 낡은 내 몸은 수명을 다해 무덤 속에서 분해되겠지만, 나는 이미 내 자식을 통해 다시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를 잉태한 순간, 쌍둥이처럼, 아이와 나, 두 존재로 분리되어, 탯줄이 잘리는 순간 이쪽에 남은 이전의 일에 대한 기억장치가 살아 있는 내 몸의 나만 오직 나인 것으로 착각한 채로 살아가고, 아이는 또 다른 몸의 욕망을 가진 개체로 분리되어... 분리된 또 하나의 '나', 타인과 반쯤 섞인 '나'로서....

자식이란... 처음에는 몸만 분리된 상태로 엄마와 일체가 되어 살아가다가, 점차 독립적인 자기 자신이 되어가고, 다른 경험을 하면서, 다른 사람인 것처럼 되어가지만, 낡은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육체로 갈아타서 살아가는 또 다른 '나'인 것 아닌가...


그렇게 가깝든, 멀든,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 웃을 수 있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생명'은 그 자체로 주어진 '생의 에너지'로 충만한 상태, 생명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 그래서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는 최대한 서로에게 따뜻한 온기를 나누어가며 살아가는 것만이 최선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꽃을 피우고, 생명은 대를 이어서라도 부활하고자 하는 것일까...


어차피 죽을 것이기 때문에 고통에도 무감해지도록 차갑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유령으로 사는 것... 그렇게 해서 또 다른 생명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소멸되어 가는, 죽음만을 향하는 삶이 진정한 삶은 아닐 테니까...


지안이 3만 살이라는 건 허구의 이야기인 드라마 속에서도 가장 확실한 허구인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게 가장 실제와 가까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겨울을 맞이하며 수없이 다시 죽을 운명이겠지만 부활한 삶은 그전보다 더욱 강해져서, 그런 생명들만이 나이테로 수 차례의 죽음의 흔적을 증거로 남기며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하고 커다란 나무로 성장할 수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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