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밖으로 나오자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반팔 티셔츠에 얇은 겉옷을 걸칠까 말까 할 정도의 날씨였다. 한국은 이제 한창 겨울로 접어들고 있을 텐데. 어쩐지 두 시간의 시차와 더불어 계절까지 거슬러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입국 심사를 기다리느라 땀까지 흘리며 약간 긴장했던 준우는,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서 안도하다가 공항 앞을 빼곡하게 메운 여자와 남자들을 보며 다시 한번 놀랐다.
“엄마, 왜 사람들이 다 종이를 들고 있어요?”
“여행사나 호텔 직원들이 자기네 손님 찾는 거야. 저 종이에 손님들 이름이 쓰여 있어.”
“우리 이름도 있어요?”
“아니, 우리는 호텔까지 걸어갈 거야. 걸을 수 있지?”
“나 다리 아픈데….”
“조금만 걸으면 돼. 가는 길에 야자수도 있어.”
어릴 때 놀러 갔다가 야자수 앞에서 찍은 사진을 가끔 보면서 좋아하던 준우는 야자수라는 말에 호기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한동안 안 보이던 틱 증상이 조금 나와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오늘은 전반적으로 아이 컨디션이 괜찮다. 감사한 일이다. 지연은 일단 한숨을 돌렸다.
호텔은 공항에서 어른 걸음으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지연과 아이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야자수 잎이 무성한 길가의 풀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준우는 잎을 하나하나 만져보며 신기해했는데, 사실 지연은 야자수를, 나무도 그렇지만 특히 바닥에 수풀 뭉텅이처럼 우거진 것들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확실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는 저만한 것도 없긴 하지만, 그 잎이 주는 느낌이 문제였다. 나무줄기도 가지도 아닌 잎사귀 주제에 뭐가 이리 크고 억세단 말인가. 쭉 뻗다 못해 아래로 꺾인 드센 이파리들을 밤에 본다면, 손톱이 길게 자란 마녀의 손가락처럼 보이기도 할 터였다. 한국 도로변의 순하고 여리여리한 연녹색 풀들이 문득 그리워졌다. 그래도 아들이 좋아하니, 지연은 기꺼이 그것들을 참아냈다.
들풀과 야자수가 뒤엉킨 길을 천천히 걸어 호텔이 위치한 동네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쪽 구석 흙바닥에서 맨발로 공을 차는 남자아이들이었다. 시간과 계절에 이어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 건가 싶었다. 들쑥날쑥 제각각 크기의 가정집들과 유치원 하나와 두어 개의 작은 호텔이 있는 고요한 동네. 그저 비행기 환승 전 하룻밤 지내고 갈 곳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조용한 시골 동네 같은 분위기를 눈앞에 마주하게 되자 지연의 마음이 약간은 몽글몽글해졌다.
(4)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