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한나무늘보 Oct 20. 2024

오늘부터 우리는 (9)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울던 준우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지연은 그제야 잠깐 침대에 걸터앉을 수 있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직 어린아이를 왜 남편이 못 견뎌 했는지 모르겠다며 원망도 하는 지연이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언제든 쉬운 날은 없었다. 지연의 온 에너지는 아이에게 집중된 지 오래였다. 특히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를 위해 자신이 친구가 되어주다 보니 정작 자기의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생 함께 갈 것 같던 고등학교 동창들은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미묘하게 관계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혼과 기혼으로 나뉘는 것 같았다. 기혼 친구들이 아파트 브랜드와 대출 금리와 학군지에 대해 심각하게 얘기할 때 미혼 친구들은 형편껏 적당히 살면 되지 왜 극성을 떠냐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미혼 친구들이 신작 뮤지컬과 오마카세와 명품백에 대해 이야기하면 기혼 친구들은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언제 집 사고 결혼할 거냐고, 기성세대에 접어든 사람다운 잔소리를 했다. 오래 유지될 수 없는 모임이었다. 기혼자인 지연은 언제부터인가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을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기혼 친구들의 결속이 굳건한 것도 아니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사는 지역에 따라, 경제적 상황에 따라, 아이가 있고 없음에 따라 서로의 입장 차가 분명함을 확인할 따름이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게 좋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회사까지 그만둔 지연은 아이 얘기 말고는 딱히 할 말도 없었는데, 특히 지연처럼 남들과 다른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본인이든 대화 상대방이든 간에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지연은 준우의 친구들 모임에서 멀어진 것처럼 자기의 친구들 모임에서도 서서히 멀어져 갔다. 준우에게 작은 기린 인형을 사 준 선주만이 그나마 연락이 이어지는 친구였다. 선주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 비자발적 딩크족으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술에 취한 누군가의 폭언을 듣고는 사람 만나기가 두려워졌다고 했다.


  “남편은 대기업에 너는 공기업에…. 힘들 게 없겠네? 하더니만, 아, 맞다, 애 안 생겨서 딩크라고 하고 다니지? 그것도 쉽지 않겠네, 이러더라.”


  폭언의 당사자는 다음 날, 요즘 자기 형편이 너무 안 좋아서 우울한데 술까지 취해서 그만 선을 넘었다며 사과했다고 한다. 거기서 기분 나쁜 티를 내 봐야 자기만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가긴 했는데 그날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며, 선주는 딱 한 번 지연의 앞에서 울먹였었다. 지연은 씁쓸한 표정만 짓고 말았는데, 그건 선주의 마음을 이해하기도 했지만, 결국 대다수의 일반적인 무리에 들지 못한 자기들 같은 소수가 서로에게 거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고 있는 상황이 비극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도 희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10)편으로 이어집니다.

이전 08화 오늘부터 우리는 (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