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이제 캄캄해졌다. 짙은 어둠이 드리워지면서, 동네 곳곳에 작은 불빛들이 하나하나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연은 다시 베란다로 나갔다. 낯선 곳의 야경을 감상하려는데 눈앞에 갑자기 동네의 밤 풍경이 둥실, 떠오른다. 속이 상했다.
‘여기까지 와서 왜…….’
헝클어진 머릿속을 잠시라도 비우고 싶었는데, 정말 그러고 싶었는데. 진저리치는 의식과 상관없이 익숙한 일상의 모습은 이미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지연의 집 거실 창에서는 맞은편 아파트의 주차장이 보였다. 주차 차단기의 바(bar)는 LED 전구 전선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달도 없이 캄캄할 때면 초록색과 빨간색의 전구가 유독 반짝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연은 주차 차단기를 보면서, 저 아파트는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 같네, 라는 생각을 했었다.
참을 수 없이 답답한 밤이면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와 근처 한강 공원으로 갔다. 지연은 거기서 강 건너편 높은 건물들과 한강 다리를 빛내는 수많은 불빛을 바라보다 들어오곤 했다. 서울 밤을 뒤덮은 온갖 조명을 보는 것이야말로 아들이 잘 때 허락되는 지연의 취미 생활이었다. 지금 준우는 잠들어 있고, 지연은 하노이 공항 근처 어느 작은 호텔의 창가에 서 있다. 어차피 남편은 그때도 새벽이 되어야 들어오곤 했으니, 둘만 있는 지금이 그때와 다를 것도 없었다. 지연은 익숙한 상황에 약간 실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낮에 낡고 초라하게 보였던 가게는 불이 하나씩 켜지면서 아늑한 식당으로 바뀌었다. 테이블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한국의 가게처럼 음악 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아서 그런가, 식당의 분위기는 소박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가게 주인은 한쪽에서 연신 고기를 굽고 있었고, 하얀 연기 몇 가닥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어두운 밤하늘로 올라갔다. 지연은 마치 고기 냄새가 자기한테까지 오는 듯, 흐읍, 하면서 숨을 한 번 들이켜 봤다. 그리고 다소 충동적으로, 비행기 일정을 바꿔서 이 마을에 며칠 머물러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머문 몇 시간 동안 ‘니하오’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눈을 깜빡거리고 이따금 표정이 멍해지는 아이를 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지연은 이곳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정말 며칠 더 있어 볼까. 어느새 잠든 지연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준우의 손을 잡고 조용한 거리를 거닐고, 베트남 아이들이 유치원 가는 모습도 보고, 예쁜 아기가 있는 슈퍼마켓에 한 번 더 놀러 가고, 멀리 하늘 위로 떠가는 비행기에 한가롭게 손을 흔들었다. 웃고 있는 지연과 아들의 옆으로 맨발의 축구 선수들이 뛰어다녔다.
(11)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