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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봉수 Jul 17. 2024

<시집> 슬퍼도 황제처럼(2)

시3편: 골무꽃, 은행나무, 꿈꾸는 자전거

4.골무꽃 - 오봉수 


치매로 요양원 가는 날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모든 것을 내어주던

등 굽은 엄마의 자리

낡은 골무가 웅크리고 있었다

골무 끼고 꿰매 주던 양말도 울고

창피하다던 양말 주인도 울었다

골무 머리맡에 두고

달빛과 더불어 뒤척이다가

늦게 잠들었다

바늘 끝 같은 서러움

새벽잠 깨어보니

온 방 가득 골무꽃 따끔따끔 피어 있었다


5.은행나무 - 오봉수 


내 나이를 나도 정확히 모른다

사람들은 대충 천년을 살았다고 한다

매년 영양제와 외과수술로 생명을 연장하지만

솔직히 나는 순리대로 살고 싶다

나도 이젠 누군가의 나무의자가 되면서

한 줌의 흙처럼 잊혀지고 싶다

폐경에 가까운 몸으로 

매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 너무 힘들다

난 매일 밤 

거침없이 날아오르는 새가

가을 냄새처럼 그리운 첫사랑을

데려와 앉았다가 사라지는 꿈을 꾼다



6.꿈꾸는 자전거 - 오봉수

 

주공아파트 자전거 거치대에

고장 난 늙은 자전거가 웅크린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계속된 야근과 불면으로 전조등은 희미해지고

아파트 대출금과 학자금 상환에 밤낮없이 뛰어다닌 결과

앞바퀴는 닳아서 펑크가 나고

기름칠 덜 된 핸들은 관절염으로 방향감각을 잃었다

 

씽씽 달리고 어깨에 힘이 있을 때는

가보(家寶)처럼 집 안에 있었지만

몸통에 하얀 꽃이 피자 명예 퇴직자처럼 집 밖으로 밀려났다

 

자물쇠가 없어도 도난 걱정은 없으며

아파트 꼬맹이들이 막대기로 펑크 난 바퀴를 찌르고

돌멩이를 던져도 경음기조차 울리지 않는다

 

밤이면 밤마다

깐깐한 아파트 관리소장이 민원을 핑계 삼아

고물상에 팔아 버릴까 봐 두렵지만

 

살얼음이 녹고 봄바람을 만나면

별을 싣고 들꽃향기 맡으며

비포장 자갈길을 흙먼지 날리며 달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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