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3편
슬퍼도 황제처럼, 시신 없는 영결식, 사진관 여자의 아버지
1. 슬퍼도 황제처럼 - 오봉수
내 비록 아침 댓바람부터 막장 민원인에게
멱살을 잡히고 짭새라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한숨 돌릴 때 일회용 종이컵이 아닌
머그잔에 얼음 몇 알, 인내심 몇 알 넣고
외근조끼 무전기포켓 밑에 숨겨둔
헌책처럼 주름진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서
황제처럼 커피를 마시고 싶다.
내 비록 점심시간에 신고출동 때문에
밥알이 입언저리에 묻고 온기가 사라진 김치찌개 국물이
흉장과 명찰에 튀어 불가사리처럼 잘 지워지지 않아도
복귀 후엔 일회용 종이컵이 아닌
머그잔에 얼음 몇 알, 초심 몇 알 넣고 덜 해롭다는 전자담배
소심하게 빨면서 황제처럼 커피를 마시고 싶다.
내 비록 야간근무 때 열대야와 아버지의 눈물 같은 주취자
죽기 살기로 폭풍우처럼 밀려오는 신고출동으로
흰머리 몇 개, 주름살 몇 개, 당뇨수치 약간 늘지라도
조회 후엔 일회용 종이컵이 아닌
머그잔에 얼음 몇 알, 배려심 몇 알 넣고 피곤함에 익숙한 양 손날로
아스팔트처럼 굳은 동료의 목덜미를 토닥거리면서
황제처럼 커피를 마시고 싶다.
2.시신 없는 영결식 - 오봉수
2013년 4월 18일, 인천광역시 강화경찰서 본관
자살기도자를 구하려고
강화도 외포리 차디찬 바다에 뛰어들어
파도에 휩쓸린 그대는 섬이 되었나요
맹수 같은 검은 밤바다에서
다시는 가족 품에 돌아오지 못할 예감에
무인도처럼 얼마나 외로웠나요
유품인 머리카락 몇 올 앞에서
하늘도, 땅도, 바다도 제 갈길 멈추고
시신 없는 영결식에 울먹였지요
사회적 약자의 호루라기이자 국민의 공복
정옥성 경감님!
그대의 살신성인과 숭고한 희생을
15만 경찰관들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고
언젠가는 우리 곁으로 들꽃처럼 향기롭게
귀환할 것을 명령합니다
3. 사진관 여자의 아버지- 오봉수
그녀의 아버지는 가난한 선장이자
4남매의 아버지였다
가족들의 생계와 선원들을 책임지며
고군분투하며 억센 바위처럼 살았다
유신 시절 때로는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경찰서에 블랙리스트로 올라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소신대로 살았다
폭풍우 치던 어느 날
배는 부서지고 선원들이 배가 고파
문이 잠겨져 있던 식당의 열쇠를 따고 들어가서
선원들의 배고픔을 달래준 것이
특수절도죄로 입건되었다
누구나 살기 어렵던 시절
술집에서 술김에 "김일성 만세"라고 말했다가
친구의 밀고와 승진에 눈먼 형사의 덫에 걸려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감옥에서 몇 년을 보냈다
출소 후 그녀의 아버지는 세상을 비관하며
술에 취해 가정폭력을 일삼다가
태풍에 휩쓸린 배처럼 침몰하였다
그녀는 동생들을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하였고
21살 때 돈 백만 원에 팔려가 듯 결혼을 하였다
공부 잘 한 남동생은 신원조회에 걸려
육군사관학교와 헌병대에서도 거부당하였다
세월이 흘러 세상은 변했고 사람도 변했다
그녀는 사진관 여자이자 시인이 되었다
재능기부로 영정사진을 찍으러 다니다가
아버지 원수들의 비참한 노년을 보았지만
라면과 쌀을 부엌에 놓아둔 후
장롱 속에 숨겨둔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하루종일 울었다
그녀의 남동생은 남들보다 늦게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빨갱이도 민주화 열사도 아니며
가족들과 선원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힘겹게 살아온
암울한 시대의 선장이자 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