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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봉수 Jul 17. 2024

<시집>슬퍼도 황제처럼(3)

시3편: 생라면, 실외기, 장기기증

7.생라면 - 오봉수 


아내의 여고동창회 모임 때문에 혼자 밥을 먹어야 했다

갑자기 유명한 여자 프로배구 감독이

'경기에 역전패했는데 퇴근 후 늦은 밤

설거지까지 하니까  너무 힘들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오늘은  갈라지고 벌어진 아내의 손에

물을 묻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설거지를 줄이기 위해 라면을 끓여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고민 끝에 설거지를 전혀 하지 않는 기똥찬 방법을 생각해 냈다

깊은 산속의 자연인처럼  생라면을 먹기로 했다

TV를 보며 라면스프를 중간중간 뿌려가며

우걱저걱 씹어먹으니

군대 생각도 나고  한 끼 정도는 대만족이다

모임에서 돌아온 아내는 옆눈으로 싱크대를 살짝 보더니

노을처럼 환한 미소를 날렸다


8.실외기 - 오봉수


처마 밑에서

불평 없이 진땀을 흘린다  


폭염에

아들 대학등록금 마련하기 위해

신축아파트 공사장에서

낡고 구멍 난 런닝을 입은 채

막노동을 하시는 아버지


열대야에

고3수험생 딸

마중하기 위해

늦은 밤까지 손부채로 버티면서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시는 어머니 


9.장기기증 - 오봉수


삭막한 도시의 칼바람 속을 함께 질주하던

이십 년 반려 친구가 툭하면 짜증을 내고

길바닥에 드러누워 검은 피를 토한다

동력이 미세해진 엔진 때문에

실비보험도 거절당하고

퇴행성관절염으로 약해진 브레이크는

위급상황에서 갈팡질팡한다

사람 나이로 치면 구십이니

잔고장으로 병원을  셀프주유소 가듯이 간다

신문에도 나온  카센터 의사는 이젠 진료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점프선을 주면서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한다

친구를 폐차장으로 데리고 갔으며

쓸 수 있는 뼈와 살들을 아픈 친구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친구의 도움을 받은 중고차들은 새 생명을 얻어

고속도로를 다시 질주할 것이다

평상시 친구는 엔진이 정지되면 연명 치료하지 말고

장기기증 해 달라고 항상 부탁했다

친구의 장례식 후 

오래된 엔진오일처럼 굳은 편견을 깨부수고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본부에 회원 가입하여

장기기증 등록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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