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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날 Oct 22. 2023

여름-3. [독일] 베를린



다양성과 어울림의 도시, 베를린.

두 번째 베를린 여행은, 나를 베를린을 완전히 사랑하게 만들었다.



I LOVE YOU, 라는 그래피티와 핑크빛 수도관(베를린은 지형적 특성상 수도관이 지상에 있는 지역이 많다고 한다)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수도관의 경우 그냥 별 생각 없이 무채색으로 칠했을 법도 한데, 도시 분위기를 확 바꿔 주는 선택인 것 같았다.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섹시하다, 라는 말을 한번쯤 들어보긴 했어도 그게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표어인 줄은 몰랐다. 번쩍거리는 풍요로움이나 화려한 도시의 이미지는 아니더라도, 다채롭고 자유로운 곳. 그곳이 베를린이었다. 그 베를린의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마르키쉬 박물관에 방문했다.



특별전으로 시민사회에 대한 전시가 있었다. 행복을 위해,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과 그로 인한 베를린의 변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탐구하는 사회과학이 내 흥미를 자극했던 것처럼, 이런 전시 또한 베를린이라는 곳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필기구의 역사를 전시한 특별전에서도 '베를린스러움'이 돋보였다. 일반적인 연필이나 볼펜뿐 아니라, 장애를 가진 이들의 필기구인 '점자 입력기'도 전시되어 있던 것이었다. 이처럼 베를린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곳이었다.



전시관 막바지에 베를린을 상징하는 곰이 박물관 앞 거리를 다니는 그림을 직접 색칠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고, 나는 가만히 앉아 여러 색깔로 베를린을 표현해보려 했다. 박물관 순찰을 도시던 한 할아버지가 내게 말을 걸었고, 독일어를 할 줄 모르는 나는 번역기로 대화를 이어갔다. 한국과 독일의 공통점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눴고, 할아버지께선 내게 좋은 여행이 되기를 빌어 주셨다.



독일 역사 박물관도 다녀왔다. 영상물 옆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안내판,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해설,  이민자와 어린이를 위한 '쉬운 독일어' 설명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시각장애인에도, 청각장애인에도, 이민자나 어린이에도 해당되지 않았음에도 무언가 온기를 느꼈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직접적 도움이 닿지 않는 사람에까지 사회의 따뜻함을 선사한다고 생각했다.



독립서점들도 다녔다. Motto라는 독립서점은 예술서적 위주로 비치되어 있었는데, 환경에 대한 계획이 없다는 것을 비꼬는 'No Plan'et 같은 어구가 곳곳에 적힌 것이 인상깊었다. '이상 날다'와 같이, 한국 서적을 찾아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Love Story라는 서점은 영어 서적들만 비치해 둔 곳이었는데, 입구에서부터 'For Diversity'를 붙여놓으며 모두를 환영한다는 안내판을 붙여 놓은 것이 인상깊은 곳이었다.



문구류도 판매하고 있었는데, 다양한 색깔의 피부빛을 표현할 수 있는 색연필 세트와 인종다양성이 반영된 색칠 공부 키트가 있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독립서점의 장점은 서점 운영진들이 책에 각종 코멘트를 남겨둔 것을 읽는 재미라고 생각한다. 책의 인상깊은 구절을 적어두기도 하고, 간단한 책 소개나 감상을 적어두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손님과 소통하는 것은, 자그마한 독립서점의 매력이다.



Do you read me?라는 서점도 다녀왔는데, 그림책 한 권에 푹 빠졌다. Weirdo라는 책이었는데, '이상한 애'로 취급받던 아이가 그냥 그 아이 자체로 인정받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림책은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었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한 프로그램에서 소개되었던 '책 빌려주는 나무'를 찾아갔다. 베를린 외곽 지역의 한 주거단지에 있었는데, 가만히 앉아 책을 구경하다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책을 가져가거나 놓아두고 가곤 했다. 누군가의 필기와 손때가 잔뜩 묻어 있는 고전 문학 책도,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그림책도 무언가 연결고리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 같은 이방인에게도 이러한 '연결'의 느낌을 주는데,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하나의 아이디어를 통해 얼마나 자주 '공동체'임을 실감할까 싶었다.



베를린의 다채로움을 느끼며 생각했다.

장애인권에 대한 대학생 협의체, 홈리스들을 위한 의료봉사단체, 비정규직 노동자에 관한 시민단체, 공익변호사단체 등등. 대학 생활 중 활동했던 단체들의 설립 목적은 하나같이 '살아감에 대한 애착'으로 귀결되었다. 살아가기 위해 울어야만 할 필요는 없으니까, 살아남기 위해 고통받을 의무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울리고 고통받게 하는 사회의 부족한 면모들을, 어떻게든 고쳐나가보려 애쓰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그리고 난 그들에게서, 내가 지구를 떠나지 못할 이유를 선물받았다. '당신들 때문에 지구를 못 떠나잖아!' 라고, 장난 반 진심 반으로 그들의 사랑을 탓하면서.

허무주의의 늪이 나를 침습할 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참 어렵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세상에 바치는 사랑은, 다양한 존재에 대한 존중은 나 같은 사람을 살게 한다. 그 사랑이 내게 직접적 도움을 주지 않는 종류더라도 말이다.

이런 세상이라면 나도 사랑이 필요할 때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믿음을 주니까.

그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구성원들에게 그러한 믿음을 주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믿는다.

사랑에 대한 믿음. 베를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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