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와 마산에서 복음 전파
데이비드 머리 라이얼(라대벽, 1876~1921) 선교사는 진주 및 마산에서 12년간 복음을 전하였고, 백정의 신분 철폐 운동인 진주 형평운동의 시발점이 된 선교사이다.
그는 호주의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7년 호주 학생 기독교 운동 총무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부산을 방문하였다. 그 후 1908년 11월 목사 안수받고, 1909년 2월 로리머와 결혼한 후, 그해 4월 호주 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내한하였다.
부산에서 1주일간 아담슨 목사 가정에 머문 후 곧바로 진주 지역에 배정되었다. 진주 지역 초대 선교사인 휴 커를에 이어 2대 진주교회 담임 목사가 된 것이다.
* 진주교회는 1905년 휴 커를 선교사가 설립하였고, 그 후 경남 지역에는 1908년 하동읍 교회, 1909년 동금리 교회(삼천포 교회), 북면 교회(현 남해 교회)가 개척되었다.
그가 사역을 시작한 1909년 5월 당시 진주 교회에는 백정을 교인으로 받아들여 양반과 갈등을 겪고 있는 시기였다. 양반이 교회에서 천민과 합석을 거부한 것이다. 그때 그는 두 명의 여선교사(메리 켈리와 넬리 스콜스)와 함께 양반을 설득하고 합석하여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
이것이 14년 후인 1923년 진주에서 백정 신분 철폐를 주장하는 진주 형평운동이 시발점이 되었다. 진주에서 시작된 백정 신분 해방 운동은 조직화되어 1924년부터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1910년부터 남해 등 지역 교회를 순회 방문하며 지역 교회를 보살폈다. 남해, 하동, 곤양 지역을 방문하였고, 1912년에는 남해 당항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팀 사역을 중요시하였으며, 전략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학생들이 기독교 운동을 활발히 하도옥 노력하였다.
그는 1914년 마산으로 이동하여 건강이 나빠진 아담슨 선교사를 대신하여 마산 복음화에 헌신하였다. 마산 교회와 창신 교회를 감독하는 일을 하였고, 마산 창신학교 2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동료 선교사와 성도들로부터 존경을 기념하고 기록되어 있다.
1915년에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7주간 강사로활동한 기록이 있고(엥겔 휴가 시) , 1916년 1차 세계대전 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가서 YMCA 봉사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17년 6월 호주로 돌아가서 잠시 YMCA와 협력 프로젝트를 추진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었다. 1918년 1월 부인과 함께 마산으로 돌아와서 3년간 활동하였고, 그 후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여 호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1921년 8월 호주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순직 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마산 창신학교는 라이얼 기념 학교(the D M Lyall Memorial School)로 명명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