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이 존재하는 때부터 우리 아빠의 차는 1톤 트럭이었다. 앞자리에는 사람이 타고 뒤에는 짐을 싣는 그 트럭 말이다. 내가 유치원생일 때 아빠는 그 트럭에 생선을 싣고 다니며 생선을 팔았다. 트럭 짐칸에는 생선이 담긴 아이스박스가 가득 실려있었다. 아빠의 옷에서는 항상 생선 비린내가 났고 그건 아빠의 트럭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초등학생 때 아빠는 흰색 트럭을 팔고 파란색 트럭을 사셨다. 생선 장사를 그만둠과 동시에 비린내가 가득했던 차를 바꾸셨다. 아빠는 그 트럭을 몰고 고물 장사를 다니셨다. 아빠의 차에는 온갖 고물이 가득 실려있었다. 아빠는 새벽 일찍 트럭을 몰고 나가 밤늦게 들어오셨다. 밖에서 아빠의 차 소리가 들리면 엄마는 아빠의 밥상을 차리기 시작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빠의 직업은 막노동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도 아빠의 차는 파란색 트럭이었다. 그때 아빠는 동네 저수지의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버스가 1시간에 한 대 다니던 시골에 살던 나는 아빠의 트럭이 굉장히 소중한 이동 수단이었다. 버스 시간이 안 맞아 시내 마트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으면 아빠는 트럭을 몰고 나를 데리러 오셨다. 그러다 내가 고3이 되었을 때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게 되었고 집에 갈 길이 막막해졌다. 그래서 아빠가 매일 밤 나를 데리러 오셨다. 파란 트럭을 몰고.
그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운동장에 나가면 딸들을 데리러 온 부모님의 차가 운동장 가득했다. 대부분은 승용차였고 우리 아빠처럼 트럭을 몰고 온 부모님은 별로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친구들이 승용차를 탈 때 낡은 트럭에 타는 내 모습이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사춘기를 지나고 있던 예민한 소녀에게 낡은 파란색 트럭에 타는 일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우리 집에는 왜 승용차가 없을까, 아빠는 왜 낡은 트럭만 타고 다닐까. 아무도 모르게 아빠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어릴 적 집이 가난해 배움이 짧았던 아빠는 몸을 써서 하는 힘든 일만 하셨다. 그런 일을 하려면 트럭을 몰고 다녀야 했고 그래서 아빠는 항상 트럭을 타고 다니셨다. 단칸방에서 방 두 칸짜리 전셋집을 거쳐 방 세 칸짜리 자가를 소유할 때까지도 아빠의 차는 트럭이었고 아빠는 평생 가족을 위해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평생을 부모님의 학력과 직업을 창피하게 생각하던 내가 취업을 하고 회사에 다니며 직접 돈을 벌어보니 평생 힘들게 돈을 벌며 살아오신 부모님의 삶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사무실에서 더울 땐 시원하게 추울 땐 따듯하게 일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아빠는 평생을 추울 땐 추운 곳에서, 더울 땐 더운 곳에서 일하며 돈을 버셨다. 고물상을 할 때도, 막노동을 할 때도 아빠는 늘 밖에서 힘들게 일을 하셨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도 아빠는 힘들다는 내색 한번 하지 않으셨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를 대학 졸업까지 시켜준 아빠의 직업을 창피하게 생각했던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어릴 때야 철이 없어서 그랬다지만 대학생이 되어서도 아빠의 직업을 창피해했던 내가 너무 싫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지난날의 내 자신이 아직도 부끄럽다.
그렇게 파란 트럭을 타고 열심히 일하러 다니시던 아빠가 암에 걸리셨다. 위암 초기에 발견해 수술하셨는데도 암은 간으로, 림프샘으로 전이가 됐다. 아빠는 항암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다니셨고 더 이상 힘든 일은 하시기 힘들어졌다. 그 무렵 아빠의 차가 마당에 서 있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햇살이 따사롭던 어느 일요일 아침, 나는 오랜만에 집에서 아빠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빠랑 거실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고 있는데 오랫동안 서 있던 아빠의 차가 보였다. 한참 동안 세차를 하지 못해 아빠의 차는 먼지 꾸러기가 되어 있었다.
“아빠 우리 세차할까?”
세차는 언제나 아빠 몫이었는데 오늘은 왠지 내가 세차를 하고 싶었다. 차에 쌓인 먼지와 얼룩들을 깨끗하게 씻어내면 아빠의 병도 싹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 세차 준비를 했다. 사실 세차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아빠가 하라는 대로 따라 하기만 했다. 아빠의 지시대로 열심히 차를 닦았다. 거품을 내고 물을 뿌리고 마른걸레로 닦으며 묵은 때를 벗겨 냈다.
아빠와 나의 발이 되어 평생을 함께한 파란 트럭은 지난 세월만큼 낡아 있었다. 그동안 아빠도 늙었고 나도 나이를 먹었다. 나는 우리 부녀의 추억이 가득한 낡은 트럭을 열심히 닦았다. 새 차처럼 윤이 나고 빛나지는 않았지만, 아빠의 파란 트럭은 목욕을 마치고 말끔해졌다. 따스한 햇살을 받은 파란 트럭이 빛이 났다. 아빠는 낡은 차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계셨다.
세차를 한 김에 아빠와 나는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아빠는 아주 오랜만에 운전석에 올랐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아빠가 좋아하시는 음악을 틀었다. 아빠의 트럭이 좁은 시골길을 달렸다. 양쪽으로 황금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황금물결이 바람에 넘실거렸다. 내 마음도 그 바람에 넘실대고 있었다, 아빠는 기분이 좋으셨는지 콧노래를 부르셨다. 아빠가 아프시고 나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콧노래였다. 나는 잠깐이라도 아빠가 아픔을 잊기 바랐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주차를 하고 아빠는 집으로 들어가셨다. 아빠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날이 너무 좋아서 마당 한편에 있던 평상에 앉았다. 마당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아빠의 트럭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운전석에 앉아 오랫동안 아빠의 손길이 닿았던 핸들을 잡아보았다.
아빠는 여기에 앉아 이 핸들을 돌리며 수많은 곳을 다니셨다. 생선 장사, 고물 장사, 막노동을 하며 여기저기 안 가본 데가 없을 터였다. 어릴 적 새벽에 내가 아파 응급실에 갔을 때도 나는 아빠의 트럭을 타고 병원에 갔었다. 수능 날 아침 트럭으로 나를 고사장에 데려다준 아빠는 내가 나오기 삼십 분 전부터 차를 따뜻하게 데워두셨다. 상념에 젖어 있던 나는 이내 차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병원에서 아빠의 삶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곧 이별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시간이 결코 오지 않길 바라지만 야속한 시간을 속절없이 흘러만 갔다. 먼 훗날 나는 나는 오늘의 추억을 곱씹으며 아빠를 추억할 것이다. 세차를 하며 웃던 아빠의 모습,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을 하던 아빠. 아빠와 닮은 사람만 보아도, 지나가는 트럭만 보아도 아빠 생각이 나겠지.
아빠의 차에서 내려온 나는 손을 털며 집으로 걸어갔다. 현관문에 들어가기 전 다시 한번 마당을 바라보았다. 아빠와 나의 소중한 추억이 가득 담긴 아빠의 차. 세월에 닳아 낡았지만 여전히 반짝이던 아빠의 삶처럼, 파란 트럭도 그날 햇살 아래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