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의 9월은 선선했다. 낮에는 햇살이 따뜻했지만, 해가 지면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어학연수도 두 달밖에 남지 않았던 그때, 나는 오빠와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다. 열 명 남짓한 학생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듣는 수업. 늘 내 대각선 자리에는 오빠가 앉아 있었다.
나는 강의를 듣는 척하며 슬쩍슬쩍 오빠를 훔쳐보곤 했다. 4월부터 같은 반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처음부터 잘 통했다. 장난도 잘 치고, 서로의 얘기에 귀 기울이며 웃을 수 있는 그런 사이.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애매하고 답답한 거리감이 있었다.
우리는 매일 점심을 함께 먹었고, 수업이 끝나면 늘 같이 집으로 향했다. 오빠는 어김없이 나를 홈스테이 앞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주말에는 영화를 보고, 카페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딱 연인 같았지만, 오빠는 단 한 번도 “우리 사귈까?”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거 어장관리인가?’
혼자 속으로 투덜거리다가도, 오빠가 다른 여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걸 보면 또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다 결심했다. 이 관계, 이제는 확실히 해야겠다고.
어느 날 수업 중, 선생님이 모두에게 물었다.
“지금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뭐예요?”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오빠가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서.
“음… 난 지금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어요. 파는 거 말고, 집에서 만든 거.”
순간 내 눈이 번쩍였다.
뭐? 떡볶이?
그건 내가 제일 잘하는 음식이었다. 한국에서 친구들이 늘 내 떡볶이를 를 찾곤 했는데, 밴쿠버까지 와서 그 재능이 빛을 볼 줄이야.
‘오빠한테 해주고 싶다. 진짜 해주고 싶다…’
하지만 홈스테이 집에서 누군가를 초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오빠에게만 따로 주자니 너무 티가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꾀를 냈다. 내 차례가 되자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떡볶이요! 내일 점심에 제가 만들어올게요. 다 같이 나눠 먹어요!”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인마트에 들러 떡, 어묵, 고추장, 고춧가루, 대파를 잔뜩 샀다. 계산대에 가득 쌓인 재료들을 보며 혼자 피식 웃었다. 이건 단순한 떡볶이가 아니야. 사랑이 들어간 떡볶이야.
다음 날 새벽, 부엌으로 살금살금 나왔다. 모두 잠든 집 안에서 조심스레 냄비를 꺼내 들었다. 떡볶이 10인분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떡은 불지 않게, 양념은 짜지 않게, 불 조절은 은근히. 오빠를 떠올리며 한 번 더 간을 봤다. 맵고 달콤한 맛이 혀끝에 퍼졌다.
‘좋아, 이 정도면 오빠 입맛에도 딱일 거야.’
점심시간이 되어, 나는 전자레인지에 식은 떡볶이를 데워 반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조금 불긴 했지만, 다들 한국의 맛이 그리웠는지 연신 “맛있다!”며 웃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오빠의 반응만 기다렸다.
가장 예쁜 도시락통에 담은 떡볶이를 조심스레 건넸다.
“이건 오빠 거야.”
오빠는 놀란 듯 나를 보더니, 이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와, 진짜 맛있겠다. 고마워.”
식은 떡볶이를 맛있게 먹어주는 오빠의 표정이, 그날따라 더 따뜻해 보였다.
수업이 끝난 후, 우리는 평소처럼 함께 걸었다. 오빠는 내가 들고 있던 빈 도시락통 가방을 대신 들어주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밴쿠버의 하늘이 노랗게 물드는 시간, 그 순간이 내 마음속에 선명히 각인됐다.
“나 때문에 떡볶이 그렇게 많이 한 거지?”
그 말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정말 맛있었어. 다음엔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주말에… 데이트할까?”
그 순간, 내 심장은 밴쿠버 하늘 위로 둥둥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오빠의 손이 내 손을 꼭 잡았다. 돌아가는 길이 그렇게 짧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날 밤, 아침에 만들다 남은 떡볶이를 데워 먹었다. 불어 터졌는데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
내 마음이 담겨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