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 문학소녀와의 재회
어릴 적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연필과 공책이었다. 한글을 깨치고 글씨를 쓸 수 있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무언가 쓰는 것을 좋아했다.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사람 이름을 쓰고 성별, 나이, 성격 같은 걸 지어냈다. 그렇게 지어낸 가상의 인물들로 그동안 읽었던 동화책을 흉내 내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쓰곤 했는데 아마도 그게 내가 쓴 소설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내 인생 최초의 상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은 과학책 독후감 상이 었다. 상장에 적힌 내 이름을 보며 가슴이 뛰었다. 좋아서 쓴 글로 상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날 이후 글쓰기는 ‘잘하면 칭찬받는 일’이 되었다. 글짓기 대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참여했고, 상을 받든 받지 못하든 나는 계속 썼다. 고학년이 되자 학교 대표로 백일장에 나가기도 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나는 꾸준히 글을 썼다. 특히 3학년 때는 글쓰기로 학교 안팎에서 여러 상을 받았다. 내게 재능이 있다고 여긴 담임 선생님은 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진학을 권하셨다. 내 실력으로 과연 그곳에 갈 수 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모님께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다. 그동안 상을 많이 받아왔기에 당연히 찬성해 주실 거라 믿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부모님의 반응은 단호했다. 글쟁이가 되어 무엇으로 먹고살 거냐는 말이 돌아왔다. 작가로 성공해도 생계가 쉽지 않다며 일반계 고등학교 진학을 권하셨다. 설령 예고에 간다 해도 타지에서 혼자 자취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더더욱 반대하셨다. 그렇게 나의 예고 진학은 무산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꿈꾸던 예고 진학이 좌절되고 일반계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예고에서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일반 고등학교에서도 꾸준히 글을 썼다. 문과를 선택하고 국어와 문학 시간을 너무 좋아하던 나는, 여전히 작가를 꿈꾸는 문학소녀였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참여한 백일장에서는 성적이 좋지 못했다. 전국 단위 백일장에서는 상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교내 대회에서조차 큰 상을 받지 못하자 나는 점점 주눅이 들어갔다. ‘내게 재능이 없는 걸까? 앞으로 계속 글을 쓰는 게 의미 있을까.’ 자신감이 없어졌다. 열심히 했지만 성과가 없자 점차 글쓰기에 흥미를 잃어갔다. 고2 가을, 대학 백일장에 참가한 뒤로 나는 더 이상 원고지를 펴지 않았다. 그때 내 학창 시절의 글쓰기는 막을 내렸다.
대학에서 글쓰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전공했다. 직장인이 된 후에도 작가와는 먼 삶을 살고 있었다. 비서라는 직업을 가져 2, 30대를 바쁘고 치열하게 사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서점에서 내 또래 작가가 쓴 책을 볼 때마다 그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 글을 쓸 수 있을까. 어릴 적 작가를 꿈꾸던 그 순간들이 그리웠다.
그러다 40대가 되고 삶이 안정되어 가자,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되살아났다. 2024년 초부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조금씩 글을 끄적이다가 혼자 쓰는 내 글이 어느 수준인지 궁금해서 ‘좋은 생각’에서 주최하는 <생활문예대상>에 응모했다. 5000여 편의 응모작 중 상위 15명에 들어가 동상을 수상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받는 상이 었다. 상금 30만 원보다도 “계속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아 마음이 벅찼다.
그때부터 나는 신나게 글쓰기를 이어 나갔다. 블로그에도 글을 쓰고 글쓰기 모임에도 참가했다. 그 후 2년 동안 여러 공모전에 도전하며 적지 않은 상을 받았다. 상장들을 정리하다 보면, 내가 글 쓰며 헛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공직문학상에서 수필 1등으로 국무총리상을 받았을 때, 포기했었던 작가의 꿈이 다시 살아났다.
다시 작가의 꿈을 꾸게 된 뒤, 나는 예전보다 더 많은 글을 쓰고 있다. 정신없이 바빴던 회사에서 돌아와 조용한 밤에 글을 쓴다. 글을 쓰는 동안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 글을 쓸 때면 현실의 무게가 잠시 사라지고, 마음이 고요해진다.
어릴 적 작가를 꿈꾸던 문학소녀는 이제 마흔을 넘겼다. 나이는 많아졌지만, 꿈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 남는 소설을 쓰고 싶다.
오늘도 책상 위에 종이를 펼친다.
다시 쓰게 된 나 자신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