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들 티낼일 있냐
단체로 옷을 맞춰서 입고 가자고 했다. 여러 모로 기념이 될 테니 단체 티셔츠나 아니면 모자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시간이 가면 기념품도 될 수 있고 이번 기회에 한번 만들어 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을 했다. 여행을 기획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혼자 생각에 제법 괜찮은 생각이라고 흐뭇해했다.
‘에이, 뭐 그런 걸 하려고 그래. 아재 티낼일 있냐.’
'쪽팔리게 단체로 어떻게 입냐'
그래도 나는 고집을 피웠다. 나에게 여행 기획을 맡긴 이상 단체 셔츠 정도는 입고 가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을 했다. 내가 꼭 해보고 싶은 일이니 불만이 있더라고 한번 해보자고 했고 다들 못 이기는 척 더 이상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티셔츠 하나 만들어 보자는 친구의 의견에 끝까지 반대 주장을 펼칠 한가한 사람도 없었다. 셔츠제작은 c가 맡기로 했다. 물론 감각이 있다거나 이런 일에 능숙해서가 아니다. 그저 시간이 좀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본인도 부정은 못할 듯.
가까운 미래에는 이런 일이 일상적인 일이 되겠지만, 나는 AI를 이용해서 로고를 제작했다.
챗GPT에 말을 걸었다.
'친구들과 함께 시칠리아 여행을 간다. 40년 지기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다.'
'우정을 주제로 한 문구를 넣어서 여행을 상징하는 로고를 그려줘.'
놀랍게도 AI는 30초 만에 로고를 완성했다. 그렇게 흡족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저작권 없이 지금 당장 쓸 수도 있고 맘에 들때까지 변경도 할 수 있다. 그나저나 큰일은 큰일이다. 아, 이 세상 디자이너들은 이제 뭘 먹고 사나. 오지랍 넓게 걱정아닌 걱정을 하면서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로고에 친구들 영문 이니셜을 넣어서 다시 그려줘.’
새로운 로고가 완성이 되었다. 비록 알파벳이 몇 글자 깨져서 쓸 수는 없었지만 이 것도 제법 그럴듯해 보인다.
'이 로고에 화가 고흐의 화풍을 사용해서 다시 그려줘.'
AI가 답하길
'고흐의 그림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은 저작권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대로 그릴 수는 없고, 고흐의 붓터치 방법을 이용하여 다시 그리겠습니다.'
리얼 똑똑한 녀석이네. 고흐의 느낌을 살린 로고가 제작되었다. 그런데 내가 쓰는 무료버전은 그림 두세 개를 그리고 나면 작동이 멈추고 하루를 더 기다리게 만든다. 아니면 유료를 사용하라는 메시지가 뜬다. 그래? 기다리지 뭐. 굳이 유료를 사용할 필요가 없을 때는 쿨하게 그냥 하루를 기다리면 된다. 이 것도 언젠가는 유료로 바뀌겠지만, 시간을 돈으로 바꾸어버리는 자본주의 논리가 여기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씁쓸하지만 어쩔것인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하지만 클라이언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절약 되었는가.
회사와 디자이너 섭외하고, 우리의 오더를 전달하고, 초안 오는것 확인하고 수정하고, 정정안을 한번 더 확인하고 고치기를 반복하다가, 이제 그만 더 이상 피곤해지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왔다리 갔다리 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시간과 비용 투자는 이제 그만하고 싶어서. 맘에 쏙 들지 않더라도.
‘그냥 그렇게 하지요.’
그동안 이런 일을 할때마다 결정하는데 걸리는 수많은 절차와 에너지 소모가 얼마였던가. 나는 별다른 수고없이 순식간에 만들어낸 우리들 여행 로고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정기 모임에 참석했다.
나는 물었다. 이 로고를 넣어서 셔츠를 제작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야 멋지네.‘
’이 걸 어떻게 만들었냐?'
’AI로 만들었다고? 생각보다 좋은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친구들은 AI로 만든 디자인을 신기해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대단하고 멋진 일을 해낸 것으로 받아들였다.
'좋네 좋아. 티셔츠 만들 때 로고를 크게 박아라.'
디자인 요금이 공짜인 로고를 티셔츠 가슴팍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박았다.
'나는 100, 나는 105, 나는 흰색, 나는 진한 회색.'
우리는 셔츠 선정을 위해 투표를 했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여행로고가 박힌 생애 최초 AI 디자인 티셔츠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런거 만들어서 뭐하냐고 거품 물던 친구들도 주문을 넣었다. 그것도 일인당 두벌씩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