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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by 파피루스 Mar 2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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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팔루가 이번 여행에서 제일 기억에 남아. 바닷가 옆에 체팔루 성당도 있고, 정말 멋졌지?”

시칠리아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팔레르모를 뒤로하고, 계획에 없던 체팔루로 차를 몰았다. 완전히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나는 솔직히 거기서, 서구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방식’ 같은 걸 본 것 같아. 대부분 휴가 온 사람들이겠지만, 늦은 시간까지 그렇게 여유롭게 밤바다를 즐길 수 있다는 게 너무 부럽더라.”

“우리가 갔을 땐 동양인은 한 명도 없었잖아. 이 사람들은 진짜 이렇게 멋지게 사는구나 싶었어.”

KSG의 말에는 진심으로 부러움이 묻어있었다.



우리가 막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시절, 일주일 이상 휴가를 낸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땐 토요일에도 출근하는 게 당연했고, 절반만 논다고 해서 ‘반공일’이라 불렀다. 그런 분위기에서 일주일을 쉰다니, 제정신이라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라에서 토요일은 쉬어도 된다고 결정했고, 사람들은 금요일까지만 일하게 되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이나 쉴 수 있으니 뭐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숨통이 트였다.
많은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일부는 "이러다 나라 망한다"는 걱정을 했다. 물론,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쉰다’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다분히 의도성이 담긴 표현이었다.
휴가를 간다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한국은 산업화의 끝자락에서 진통을 겪는 와중이었고, 그래서 ‘쉰다’는 것은 뭔가 들키지 말아야 할, 남몰래 누리는 호사처럼 느껴졌다.


유럽인들은 평균 20일에서 30일 이상의 유급 휴가를 보장받고, 그것을 ‘한 번에’ 사용하는 일이 흔하다.
여름이면 최소 2~3주 긴 여행을 떠나고, 이탈리아나 프랑스, 스페인에서는 아예 도시 전체가 한 달간 텅 빈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페라고스토(Ferragosto 이탈리아의 8월 15일을 기념하는 공휴일. 농업 부문에서 몇 주 동안 열심히 일한 후 8월 1일을 휴식일로 만든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축제인 Feriae Augusti에서 유래됨)’처럼 전통적인 여름휴가 기간에 맞춰 움직인다. 

요즘에는 많이 변하긴 했지만, 한국인들은 보통 3~5일의 짧은 휴가를 쪼개서 쓰는 경우가 많다. 아직도 긴 휴가는 눈치가 보이거나 회사의 분위기상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가”보다는 “주말여행”이나 “연차를 붙인 짧은 여행”이 여전히 더 일반적이다.

반면, 유럽인들에게 휴가는 삶의 일부다. 관광보다는 휴식과 재충전, 관계 회복, 자연과의 접촉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폼 잡는 것처럼 보이만, 그들은 바닷가에서 책을 읽거나, 가족과 오래 시간을 보내거나, 농가에서 요가와 와인을 즐기는 식으로 시간을 쓴다.


체팔루의 밤바다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느긋한 여유를 누리려면, ‘보장된 긴 휴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휴가는 여전히 ‘보상’의 개념이 강하다.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주는 짧은 선물 같은 것. 그래서 ‘최대한 많이 보고, 먹고, 경험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작동한다.

한때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는 광고 카피가 있었다. 그 말은 곧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면 떠나지 말라”는 전제가 달려 있는 말이었다. 우리가 떠나기전 어떤 지인은 “거기 가서 술이나 마실 텐데, 그냥 한국에서 마시면 되지 않느냐”는 식의 휴가 무용론까지 들먹였다. 우리는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데, 평생 한 번쯤 이 정도의 여행은 갈 수 있지 않느냐’는 자기 합리화와 보상 논리를 쌓은 끝에야 이번 여행을 결정할 수 있었다.



코로나 이후, 휴식의 개념은 ‘장소’ 중심에서 ‘시간’ 중심으로 바뀌었다. 재택근무와 비대면 업무가 일상화되면서, ‘사무실에 있어야 일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무너졌고, 일과 삶의 경계도 흐릿해졌다.

이 변화는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는 유연함을 주었지만, 동시에 휴식조차 업무의 연장처럼 되어버리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업무 메신저와 카톡, 화상회의 덕분에, ‘쉰다’는 감각을 잃어버린 이들이 많아졌다.

이제 AI가 눈앞에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일과 쉼’의 의미에 대해 다시 묻기 시작했다.
AI가 반복적이고 논리적인 작업을 빠르게 대체하면서, 인간은 "왜 일하는가", "무엇을 잘해야 살아남는가"라는 질문 앞에 섰다.
또한 “어떤 직업이 없어질까?”가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의 몇 퍼센트가 AI로 대체 가능한가?”로 질문이 바뀌었다. 그리고 창의성, 감정, 공감 능력처럼 눈에 보이지 않던 역량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쉼’에서 비롯된다는 인식도 함께 자라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관광지를 찍고 돌아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한 달 살기처럼 ‘그들의 일상에 잠시 들어가 살아보는 여행’이 새로운 흐름이 되었다.
시칠리아 같은 곳에 2~3주 머물며 요리도 하고, 시장에도 가고, 바닷가에 앉아 책을 읽는 시간. 그건 더 이상 사치가 아니라, 더 나은 나를 위한 하나의 방식이 되어가고 있다.


KSG는 산부인과 의사다. 병원 스케줄에 맞춰 생활하다 보니, 우리 멤버 중에서 휴가를 내기가 가장 어려웠다.
그는 매일 아침 수영으로 몸을 풀고, 십여 킬로미터 달리기를 소화하는 막강한 체력을 자랑한다. 무엇보다 친구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줄 줄 아는 '듣기의 달인'이기도 하다. 그는 그 멋진 도시, 체팔루를 누구보다 깊게 기억할 것이다 언젠가 다시 그 밤바다를 찾게 된다면, 아무런 일정도 없이, 그저 느긋하게 쉬어보고 싶고 말했다. 체팔루는, 그렇게 쉬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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