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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소리 Oct 22. 2023

전업맘도 휴식이 필요하다구요.

[초등 육아휴직이라는 정서적 보상]  #8

 회사에서는 무조건 내 이름이 불렸다. 휴직을 하고 나니 나는 '누구의 엄마'일 뿐이었다. 우리는 엄마이기 전에 이름이라는 고유명사를 가진 사람이다.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갖는 행위는 내 삶의 이유를 한 번씩 확인해 볼 수 있는 시간이자 한층 더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한 충전제이다.


 한 달간 여름방학을 보내고 나니 집에서 아이를 케어했던 엄마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돌밥돌밥’은 방학 동안 돌아서면 밥을 차려하는 엄마들의 고충을 가장 잘 표현한 신조어인 것 같다. 집에서 하루 세끼를 챙겨 먹이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또 학업과 놀이 사이에서 아이와 줄달리기를 하고 나면 진이 빠진다. 꼭 해야 할 일은 미리 끝내고 놀았으면 좋겠는데 다 놀고 나서 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나 대체로 놀다 보면 시간이 부족해서 해야 할 일을 미루게 된다. 어제 말해줬던 설명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다 보면 저절로 인내심을 수양하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방학 동안 고생한 나를 칭찬하는 의미로 개학하고 난 뒤 고등학교 친구들과 늦은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솔직히 회사를 다니고 있던 나라면, 주말은 대부분 아이 위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의무감에 친구들과 1박 2일로 여행을 가는 것을 기피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이와 한 달을 찰싹 붙어 있었으니 엄마의 의무는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친구들과 어느 곳으로 떠날지 의논하는 할 때부터 떨림을 느꼈다. 8월 말의 낮은 여전히 햇빛이 이글거렸고 자연스럽게 동해 바닷가를 목적지가 정해졌다. 원래 나의 여행 스타일은 효율 끝판왕이다. 여행 갈 장소가 정해지면 숙소 주위에 관광지, 맛집, 쇼핑 리스트를 만든다. 시간 단위는 아니어도 아침, 점심, 저녁 3개 단위로 대략적인 식사 장소와 동선을 정한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평소와 다르게 보내보았다. 숙소부터 식당까지 그 어떠한 것도 내가 먼저 조사하거나 결정하지 않았고 여행 계획 알아보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일임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여행 전날이 되었다. 여행 가방에 빠트린 물건은 없는지 체크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일찍 일어나 KTX를 타러 출발했다. 오랜만에 어스름한 아침을 맞이하며 버스 정류장에 나 혼자 서 있으니 괜스레 콧노래가 나왔다. 텅 빈 버스에 앉아 최신 노래를 들으면서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감기가 걸렸던 친구의 가방을 보자마자 놀리기 바빴고 다른 친구가 사준 커피로 잠을 깨우며 KTX를 탔다. 오랜만에 탄 KTX는 많이 변해있었다. 무선 충전기도 설치되어 있고, 좌석 앞쪽에 화면도 나오는 모습이 마치 비행기를 탄 느낌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몇 개의 역에서 정차를 했다. 정차하는 동안 바깥 풍경을 보고 있다 보면 어릴 때 느린 기차를 타고 할머니댁에 가던 때가 떠올랐다. 우리 가족은 때때로 할머니댁에 갈 때 기차를 타고 갔었다. 대전역에서는 다른 역보다 조금 더 길게 정차했는데 그때 아빠가 얼른 역 안에 있는 간이식당에서 우동 세 그릇을 사 오셨다. 달리기도 빠른 데다가 그 뜨거운 우동 그릇 세 개를 들고 온 아빠를 나는 슈퍼맨이라고 느껴졌다. 다음에 신랑이랑 아이와 그 역을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강릉역에 다다랐다.

 처음 우리를 맞이한 강릉역은 깔끔했다. 우리는 곧장 택시를 타고 안목 해변으로 향했고 뻥 뚫린 동해바다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줬다. 바다를 바라보는 카페들 중 한 곳으로 들어가 빵과 음료수를 마시며 바다 멍을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느림의 미학에 점차 젖어들었다. 아이 하교 시간을 맞추기 위해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지 않아도 괜찮았다. 천천히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느릿느릿 걷다가 발길이 닿은 귀여운 소품 가게도 한가로이 둘러봤다. 올해 처음 백사장에 앉아 파도를 보며 각자의 사연에 몰두하기도 했다. 숙소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었고 인테리어에서는 온화함이 뿜어져 나왔다. 다음 날도 맛있는 순두부찌개를 먹고 설렁설렁 구경하다 보니 금세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여행하는 내내 친구들이 나를 불러준 덕분에 내 이름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KTX 안에서 나는 차분하게 '누구의 엄마'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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