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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소리 Oct 22. 2023

인생에 대한 중간 정산 받기

[초등 육아휴직이라는 정서적 보상]  #2

 아들이 7살 때 유독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를 알려주는 책을 좋아했다.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나른해지는 주말 오후. 나란히 벽에 기대어 책을 읽다 보면 아들은 사랑스러운 눈빛을 띄면서 나에게 설렘을 표출했다.

“엄마. 나 이탈리아 가서 곤돌라 타보고 싶어. 그리고 하루 종일 피자랑 파스타만 먹을 거야.”

“에펠탑이 실제로 얼마나 높은지 너무 궁금해."

“런던 아이가 세계에서 제일 큰 관람 차래. 나도 타보고 싶어."

그럴 때마다 나는 늘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도 유럽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진짜 진짜 가보고 싶어. 나중에 꼭 같이 가보자.”


 OTT(Over The Top) 이용이 보편화되면서 육아 퇴근 후 나의 즐거움은 폭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 그동안 놓쳤던 웰메이드 드라마를 보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는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누구에게나 찬란하였던 젊은 시절이 있지만 세월의 힘에 저항하지 못한 채 어느덧 노년이라는 시간에 도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반짝였던 시절의 나인 듯 살아간다. 우리 부모님도 본인들의 청춘 이야기를 시작하실 때면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느낀다. 나 역시 친구들과 십여 년 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다시금 즐거워질 때가 부지기수다. 이렇듯 추억이 갖고 있는 힘은 대단히 강하다. 어떠한 사람에게는 추억이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나의 강력한 추억 중 하나는 고3 수험생활을 마치고 부모님과 함께 떠났던 여행이다. 아버지 친구분들과 가족들이 함께 떠난 패키지여행으로 계획된 일정대로 움직이기 바빴다. 그러다가 드디어 자유시간이 생겼고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mp3로 노래를 들으며 괌의 주택가를 산책하였다. 살짝 습하고 더운 공기와 연신 내리쬐는 햇살, 알록달록한 집과 초록 식물들은 내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다. 불쑥 아무도 모르는 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꽤나 낭만적이었다. 오롯이 나 혼자 즐기는 시간 덕분에 그 이후로 나는 여행이란 것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고, 여행에 노래를 곁들이는 시간을 항상 만들고 있다.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 마지막 회를 보던 날. 주인공에 대한 가여움 때문이었는지, 엄마로서의 공감이었는지, 경이로운 청춘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아주 많이 눈물을 흘렸다. 이름 모를 감정에 휩싸인 채 눈물을 털어낸 뒤에도 한참 동안 그 감정이 유지됐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얼마 남지 않은 나의 30대 시절을 더욱더 반짝이고 행복하게 보내기로 결심했다. 묵묵히, 부지런히 살아왔던 나의 인생에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육아휴직을 공표하고 얼마나 달려왔을까. 어느새 두꺼운 외투를 찾게 되는 추운 겨울이 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아이의 사촌 동생이 프랑스 남부도시인 액상프로방스로 비올라 연수를 떠나기로 결정되면서 우리 아이도 내년 2월 초쯤 남부 도시 및 파리로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유럽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는 액상프로방스라는 도시를 블로그로 찾아봤고 그러다가 파리로 랜선 여행을 떠났다. 이리저리 알아보면서 같이 떠나고 싶은 마음은 바이칼 호수보다 컸지만 현실은 불가능했다. 새해가 되면서 2월 중순까지 마지막 보고를 끝낸 후 육아휴직을 시작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한번 파리로 랜선 여행을 다녀왔더니 파리지엥이 향수병에 걸린 것 마냥 지금 당장 파리로 떠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휴직 시작일과 초등학교 입학식 사이에 가능한 여행 날짜를 계산해 봤고 그 사이에 아이 유치원 졸업식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때부터 나의 자기 합리화가 시작했다. 첫 가족 유럽 여행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초등 육아휴직 기념 여행, 아이 유치원 졸업 겸 초등학교 입학 축하 여행, 미리 다녀오는 3월 결혼기념일 여행, 서울에 사는 시어머니와 고모네를 파리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 등등. 결국 유치원 졸업식은 참석하지 않는 방향으로 생각이 기울어졌고 아이에게 의견을 물었다. 아이는 드디어 유럽을 간다고 좋아했다가 곧장 시무룩해졌다. 유치원 졸업식 때 부를 노래를 부단히 연습하고 있었는데 그 노래를 무대에서 부를 수 없게 된 것이 속상하다고 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다가 아이에게 에펠탑 앞에 연습한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 졸업식 무대보다 더 큰 곳이라고 말해주었고 다행히 아이는 여행을 가는 것에 동의해 주었다.

 8살 아이와의 유럽 여행은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14시간 비행동안 모니터를 보다가, 자다가, 먹다가를 반복하며 우리 가족은 무사히 히스로 공항에 도착했다. 늦은 밤이라 공항 근처 현지 택시가 위험하진 않을지 걱정하면서 우리 세 가족은 손에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무사히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고 19시간 정도의 이동 일정을 견딘 아이가 대견하여 많이 칭찬해 주었다. 시차를 적응할 틈도 없이 우리 가족은 곯아떨어졌고 다음날부터 고대하던 런던 여행을 시작했다. 원래 나란 사람에게 미술 전시장이란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 재촉해야지만 마지못해 가는 장소였다. 하지만 내셔널갤러리를 방문한 후 미술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시대순으로 감상하는 루트를 조사하고 갔더니 쏙쏙 이해가 되었다. 이런 나와는 다르게 아이는 모네의 그림을 보고도 감탄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 자연사박물관에 가는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래도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이라고 주장하는 엄마이기에, 유명한 그림 앞에서는 반드시 아이의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아이가 전시 관람시간 동안 버텨주기 힘들 것임을 예상하고 한국에서 기념사진을 남겨두고 싶은 명작 5점을 미리 선택해 두었다. 그리고 그림들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아이에게 스티커를 주고 스티커 5장을 다 모으면 내셔널갤러리 가까운 곳에 있는 레고샵에서 원하는 레고를 사주기로 약속했다. 반고흐의 '해바라기' 앞과 얀반 에이크의 '외교관들' 앞에서도 뚱한 표정이었지만 미션을 완료하고 나서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까 유치원 때 배웠던 그림들이 몇 개 있었다고 조잘거렸다. 런던에서 4일간의 여정을 끝내고 파리로 넘어가기 전, 운이 좋게 괌 여행 때처럼 또다시 노래로 각인된 추억이 생겼다. 그날은 세인트 판크로스역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로 넘어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 가족은 런던에서 여유로운 일정을 가져보지 못해서 피카딜리 서커스의 예쁜 카페에서 홍차를 마시며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숙소 근처 정류소에서 내렸다. 버스 정류소에서 숙소로 걸어가고 있는 데 어디선가 샘 스미스의 ‘I’m not the only one.’이 들려왔다. 노래가 퍼져 나오는 쪽을 찾아봤고 그 노래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버스킹을 하는 소리였다. 그날의 그 시간, 약간 흐리고 쌀쌀한 날씨 속에 보이는 고풍스러운 런던의 거리가 스크린샷으로 찍혀 내 머릿속에 저장되었다. 파리에서는 에펠탑 앞 카페에 앉아 햇살을 맞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여유로움과 '오 샹젤리제' 노래를 부르며 샹젤리제 거리를 누빈 아이와 조카의 모습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루브르 박물관은 가이드와 함께 투어를 했는데 우리 세 가족은 엄청난 집중력을 유지했다. 자연스럽게 신랑과 나는 다음 여행의 목적지를 파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탈리아로 정했다. 인생에 대한 중간정산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이 추억을 들추며 또다시 열정적으로 현실을 살아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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