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 하면 1, 안하면 0.
안녕하세요? 신대리입니다.
비록 회사를 그만둔 지 한 달 반이 다 되어가지만, 이름은 아직 대리입니다.
저는 25년 3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 세계 여행을 시작한 30대의 성인 여자입니다.
회사 생활 내내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장기여행을 시작하며 한동안 손에서 놓았던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저는 발리를 지나 태국 아유타야에 머무르고 있고, 현재 길거리에선 송크란 축제가 한창입니다.
늘 잔잔했던 일상과 달리 매일매일 새롭게 차오르는 사건사고가 어찌나 많은지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깃거리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브런치를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속마음을 터 놓는다는 마음으로, 저의 여행기를 이곳에 남깁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1 안 하면 0. 꿈은 실행하면 현실이 된다.
회사를 다닐 때의 나는 항상 엇비슷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적은 자유 시간에 대한 보상 심리로 밀려드는 잠을 참으며 핸드폰을 보다 늦게 잠든 스스로를 탓하고. 주섬주섬 지옥의 아침 지하철을 타고 한시간 거리에 서울로 출근한 다음
어제 했던 일인 지 오늘 했던 일인지 내가 해도 남이 해도 크게 티가 나지 않는 업무들을 처리하고
미용 목적이 아닌 생존을 위한 몸부림인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의 평범한 하루 루틴입니다.
일주일의 5일을 엇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정작 기다리던 주말이 되면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인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통째로 보내곤 했습니다.
그런 일주일이 모여 일 년이 되고 또 몇 년이 되었을 때, 나는 6년 차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이리저리 사고 치며 하루에도 열두 번씩 기분이 날뛰는 매일매일이 스펙타클했던 학창 시절과 사회 초년생때와는 달리 삶은 조금 더 안정되었고 마음속 여유는 조금 더 늘어났습니다.
큰 사고가 없다면 앞으로도 10년, 20년을 비슷한 인생을 살게 되겠지요.
반복된 루틴에 지친 기운을 충전하기 위해 침대 위에 늘러붙은 나를 위로해 주는 건 유튜브 속 여행 다큐멘터리와 유튜버들이었습니다.
알고리즘에 따라 끊임없이 틀어지는 영상들은 지금의 내가 꿈도 안 꿔본 수많은 곳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쩔 땐 돈을 주어도 가고 싶지 않은 나라들을, 어쩔 땐 지구에 저런 곳이 있다고? 싶은 비현실적인 지역들을,
어쩔 땐 고등학생의 내가, 20대의 내가 그토록 꿈꿨던 나라들을 방문하는 여행이 손바닥만 한 핸드폰에서 펼쳐졌습니다.
지금의 삶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딴생각이 듭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어릴 때부터 나홀로 장기 배낭여행이 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어른이 되면 할 일 <버킷 리스트>에 1번으로 적어 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나의 평생의 짝사랑이자 취미이자 특기는 늘 여행이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우주에서도 미세먼지 만큼 작다는데 그보다도 더 작은 한국에서만 머무르는 건 좀 아쉽다는 생각을 항상 하거든요.
물론 시간도 없고 돈도 없는 삼십대의 나는 통장과 타협한 가까운 나라, 짧은 여행들만을 계속해서 다니고 있긴 한데요. 그래도 첫사랑처럼 항상 장기 여행에 대한 꿈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꿈은 꿈이고 곧바로 회사를 때려치고 꿈에 그리던 세계 여행을 실제로 가는 건 또 다른 얘기이지요.
나는 열심히 벌어 먹여 살려하는 늙은 강아지와 제가 있고 뉴스에선 경제가 안 좋아 재취업도 힘들다는 무시무시한 얘기가 매일매일 반복되고 있거든요.
인생은 현실이고, 나는 중년과 노년의 저를 책임져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이 와중에 잘 다니고 있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무직인 상태로 벌어놓은 돈을 까먹으며 세계여행이라니요?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저도 압니다.
그래 여행은 일 년에 한두 번 잠깐씩 다녀오는 걸로도 충분하지. 꼭 회사를 그만두고 장기로 가는 게 중요하겠어?
고민할수록 가지 않아야 할 이유만 많아졌습니다.
점점 안정적이고 현실적으로 변한 내가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그리고요. 언제나 그렇듯, 깨달음은 평범한 어느 날 찾아왔습니다.
그날도 회사 동료들과 한참 수다를 떨던 참이었습니다.
동료는 자신이 회사 외적으로 꿈꾸는 일이 있고, 그 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안정적인 생활을 그만두고 불안정한 미지의 그곳으로 한 발을 떼는 게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성향을 잘 알고 있던 저는 평소처럼 아메리카노를 빠른 속도로 흡입하며 가볍게 내뱉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길고, 지금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어린 나이이지 않냐고요.
해도 고민, 안 해도 고민이라면 일단 해보라고요.
하면 1이고, 안 하면 0이지 않냐고요.
.
.
.
아!
.
.
.
저는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안에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제가 그 대답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있었던 것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남들의 좋은 점을 잘 캐치하고 긍정적인 얘기를 해주는 걸 좋아하는 나는, 나에게 가장 가혹한 사람이 나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의 도전을 축하하고 응원해 주면서 스스로에게는 항상 안 되는 이유만, 실패해야만 하는 이유들만 찾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것을 깨달은 지 일 년 뒤, 저는 회사를 그만두고 반년 간의 세계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도 제 고민은 계속되었지만 그래도 결론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쉽게 내뱉은 나의 정답이 마음속에 콕 박혀 갈대 같은 마음속 어른의 내가 꺾이지 않게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뭐든 실행하면 1, 실행하지 않으면 0이라는 것을요.
저는 한 달째 여행을 하며 머릿속으로만 하던 일들을 조금씩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아침엔 글과 그림을 그리고, 오후엔 여행을 합니다. 아직 크진 않지만 조금씩 손에 쥐는 금액도 생겼습니다.
아직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마음 한켠엔 두려움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던 것들을 실천하는 하루하루가 천천히 쌓여가고 있습니다.
정말로 한발짝 나아가니 꿈도 현실이 되기는 하는 것이었군요.
***
일 년 넘게 조금씩 사모은 여행 준비물 잘산템 세 가지.
1. 스포츠 샌들
튼튼하고 발이 편해 어디든 나와 함께하는 스포츠 샌들(테바). 더운 나라에서 양말 죽어도 못신는 사람에겐 필수로 추천! (슬리퍼나 크록스는 오래 걷기에 안좋음)
2. 아이폰 16 Pro.
열심히 영상과 사진 찍겠다고 고프로를 챙겨왔지만 가방 밖으로 꺼낸 횟수 10회 미만. 나의 지도이자 무전기이자 개쩌는 화질의 카메라인 아이폰 프로. 여행 떠나기 전 급하게 안바꿨다면 억울할 뻔.
3. 코토팍시 백팩+힙색
캐리어처럼 활짝 열립니다. 인스타에서 보고 꽃혀 사겠다고 일본까지 날아갔다 오게 만든 나의 여행가방. 크기는 조금 작지만 정리광인 나에게는 딱 좋습니다 (코토팍시 알파 35L + 힙색 3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