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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Oct 21. 2024

[장편소설] 원더랜드와 초록색 꽃(3)

나는 용기를 내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놀이기구들이 궁금한 건 아니었다. 만약 안에서 놀이기구가 움직이고 있거나 사람들이 많았다면 오히려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행되고 있는 놀이기구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고, 단지 노래 소리만이 안에서 들려올 뿐이었다.


간판 앞에 무심코 서있다보니 문득 이곳에서 오늘 밤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에는 편의점이나 24시간 영업하는 카페가 없었기 때문에 밤을 안전히 보낼 수 있을만한 곳은 여기밖에 없었다.


입구로 들어서고 나서도 한참동안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낡은 시설의 외벽과 놀이기구와는 달리 바닥이나 쓰레기통은 떨어진 쓰레기 조각 하나 없이 깔끔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낡은 노래소리만 점점 더 커질 뿐이었다.


슬슬 다리가 아파와 벤치가 있을만한 곳을 찾으려고 발걸음을 떼자마자 오른쪽 끝 모퉁이에 벤치 두어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는 폐쇄된 것처럼 보이는 롤러코스터 탑승 입구가 있었다.


벤치까지 가까이 다가서자, 벤치 위에 놓인 알록달록한 종이가 보였다. 에이포용지 크기의 종이에는 곰과 사람이 그려져 있었고, 그들을 가리키고 있는 말풍선에는 '엄마, 놀이공원 가고 싶어요.' '안돼. 위험해!'라는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맨 위에는 아주 큰 글씨로 '원더랜드와 우리 가족'이라고 쓰여 있었다. 종이를 잡고 있던 손가락에 알록달록한 크레파스가 묻어났다.


고개를 들자 또 다른 벤치의 옆에도 똑같은 그림이 있었다. 역시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사소한 부분들은 조금씩 달랐지만 똑같은 그림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밑 부분에 ticket이라는 글자와 점선이 보였다. 점선의 모양을 보니 그대로 뜯으면 티켓이 되는 모양이었다. 뒷장에는 간단한 약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약도의 끄트머리에 롤러코스터가 있는 걸 보니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인듯 했다. 나는 종이를 붙들고 약도에서 가리키는 곳을 찾아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만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작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극장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작고 노란 조명 아래의 무대에서 마술사가 등장해, 커다란 모자 속 비둘기를 꺼내 놀래켜 줄 것만 같았다. 입구는 벨벳으로 된 묵직한 천 커튼으로 닫혀 있어서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는 구조였다. 안에서 아주 작은 인기척들이 한번씩 들리는 것 같았지만 쉽게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몇 분 간 그 앞을 조용히 서성이기만 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입구의 커튼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에서 무언가가 등장했다.

나는 그 형체를 보고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주저 앉으면서 콘크리트 바닥에 종아리 쪽 살이 쓸렸는지 쓰라린 고통이 한 순간에 다리를 휘감았다. 쓸린 부위가 꽤 넓었나 보다.


"괜찮으세요?“


그 커다란 형체는 독특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그의 생김새가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그건 확실히… 곰이었다.


손가락으로 눈을 비벼 다시 확인했지만 분명히 곰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곰이 아니라 곰 인형이다. 사람 크기만한 인형. 다만 머리 크기와 몸의 비율이 정말 곰인 것처럼 현실적이라 어둠 아래에 얼핏 보면 진짜 곰으로 착각할만한 생김새였다.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떴다. 생김새는 둘째 치고, 왜 인형이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놀라운 일이었지만 왠지 놀랍지가 않았다. 분명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한데, 눈 앞의 이 곰 인형이 말하고 있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달까. 당신, 왜 말하고 있는 거야? 라는 질문이 전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아, 네…."

"아닌 것 같은데요.“


곰 인형은 허리를 깊이 숙인 채 내 다리를 보더니 바로 쪼그려 앉아 더 가까이서 다리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 역시 다리를 들여다 봤다. 넓은 부위에 상처가 났을 거라는 내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종아리에 거의 손바닥 크기만큼의 쓸린 자국이 나 있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피부가 넓게 쓸려 상처 사이사이 작은 핏방울들이 여러 개 맺혀 있었다. 그걸 보고나서야 더 큰 고통이 느껴졌다. 으윽, 하는 소리와 함께 인상을 찌푸리자, 곰 인형이 내게 바짝 다가왔다.


"어! 혹시 연극 보러 오셨어요?"

"연극이요?“


곰 인형의 얼굴이 내 손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건 아까 벤치에서 주웠던 그 정체불명의 그림. 그때서야 이 종이에 그려진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이거 연극 티켓인가요?"

"네. 맞아요. 아… 연극을 보러오신 게 아닌가요?"

"음, …아뇨. 보러온 거 맞아요."

"정말요?“


곰 인형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허허허, 라고 해야할지, 걸걸걸, 이라고 해야할지. 아무튼 독특한 소리로 웃던 곰 인형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바닥이 차갑죠? 안으로 들어가요. 연극이 시작하려면 삼십 분 정도 남았으니까 그 전에 다리를 치료해 줄게요."

"괜찮은데요."

"엄청 아파보여요.“


나는 말도 안 되는 이 곰 인형을 따라가기가 무서웠다. 애초에 연극을 보러 온 것도 아니었다. 투박하게 그려진 이 종이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서 뭔가에 끌리듯이 여기까지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 손에 들린 종이를 보고 반가워하는 곰 인형의 목소리를 듣자 곰 인형을 실망시키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연극을 보러 온 게 맞다고 대답해버렸다.


조명 하나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폐쇄된 놀이공원이라는 공간도 현실답지 않은 곳이었지만, 여기에 있는 이 독특한 소극장과 곰 인형은 더더욱 꿈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는 곰 인형과 대화를 나누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이 꿈이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 정확히 구별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빤히 곰 인형의 얼굴을 쳐다보자 곰 인형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마주 바라봤다.


"이런 걸 물어봐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 어떻게 말을 하는 거예요?"

"네? 입이 있으니 말을 하죠."

"입이 전혀 움직이질 않는데요. 그것보다 그쪽은 인형이잖아요."

"인형이요?“


곰 인형은 잠시 생각하는 듯 아무 말 없이 멈춰있더니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아까의 웃는 소리와는 아주 다른 소리였다. 이번에는 훨씬 더 크고 호탕했다. 그러다 갑자기 얼굴에 손을 가져가더니 있는 힘을 다해 얼굴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어어, 하며 곰 인형의 손을 붙잡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곧 곰 인형의 얼굴이 사라지고 그 안에서 사람의 얼굴이 나왔다.


"나는 인형이 아니라 사람인데요. 곰 인형 옷을 입은 사람."

"네?“


믿기지 않아 곰 인형의 손에서 얼굴 탈을 뺏어 이리저리 살폈다. 이런 인형 탈은 본 적이 없었다. 번화가나 놀이공원에 자주 있는 이런 인형 옷과 탈을 쓴 사람을 본 적이 자주 있었지만, 이런 생김새는 처음이었다. 어둠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정말 곰 인형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탈을 두 손에 들고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그가 잡아 일으켰다.


"안으로 들어가서 치료해 줄게요."

잊고 있던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며 쓰라려왔다.


소극장 안에서는 눅눅하고 답답한 냄새가 났다. 아주 오래된, 천이 많은 곳의 내부에서 나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였다. 내가 아주 작았을 때 아빠가 타던 오래된 승용차에서 맡았던 냄새와 비슷했다. 아빠의 승용차의 좌석들은 전부 천으로 된 커버가 씌워져 있었다. 어릴 때는 그 차에만 타면 멀미를 해서 어디 멀리에 갈 때면 뭘 먹지도 못하고 고생을 했었다.


어둑한 무대 뒤의 작은 공간으로 들어가자 곰 인형과 비슷한 크기의 인형 옷과 독특한 옷을 입은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다. 한 사람은 멜빵 바지를 입은 소년의 옷과 인형 탈을 쓰고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앞치마를 한 여자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앞치마를 한 여자의 옷을 입은 사람은 인형 탈을 쓰지 않아서 한 눈에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는 우리 엄마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곰 인형의 얼굴을 쳐다봤다. 나와 비슷한 또래거나 조금 더 나이가 많을 것 같았다. 생김새는 완전히 내 또래 같았지만, 왠지 표정에서 성숙한 느낌이 났다.


"우리 연극 보러 온 관객이래요."

"정말?“


인형 탈을 쓰지 않은 아주머니가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기엔 어린 손님이네."

"그게…."

"뭐 어때요. 어쨌든 손님이잖아요."

"그런가. 참. 학생. 그거 잊지 않았지?"

"그거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표 값 말이야. 칠천원인데."

"아, 잠시만요.“


나는 급하게 가방을 뒤졌다. 놀란 마음에 급하게 서두르다가 그만 가방을 바닥에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곰 인형이 웃으며 대신 가방을 주워줬다.


"이 손님한테는 돈 받지 마요. 제가 잘못한 게 있어서 돈 받으면 안 돼요."

"무슨 잘못?"

"제가 다치게 했어요."

"어딜?“


곰 인형이 내 다리를 가리켰지만 아주머니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곰 인형이 나를 뒤로 돌려세우더니 종아리 쪽을 뭉뚝하고 커다랗고 푹신한 손으로 가리켰다.


"아이고, 어쩌다 이런 상처가?"

그러자 있는 줄도 모르게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멜빵 바지 아저씨가-목소리를 들으니 남자, 그것도 아저씨인 것이 확실했다-갑자기 다가와 내 종아리를 들여다봤다. 셋이서 내 종아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게 민망해서 다시 뒤를 돌았다. 멜빵 바지 아저씨는 다시 구석으로 가 짐이 한 가득 쌓여 있는 선반을 이리저리 뒤져보더니 옆의 작은 서랍장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곧 연고와 작은 상자를 들고 곁으로 다가왔다.


"상처가 넓어서 그냥 데일밴드로는 안 되겠어. 거즈로 대고 테이프로 붙여야지.“


아저씨가 상자를 열자 각종 약들과 거즈, 그리고 의료용 테이프가 보였다.


"별로 큰 상처도 아니구만 무슨 그렇게 유난을 떨어."

"이잉, 손바닥만 한데?"

"돈 안 받는다면서.“


아주머니가 투덜거리며 아저씨를 노려봤다. 왠지 이런 상황에 웃음이 나와 나는 쿡쿡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다시 가방을 뒤졌다.


"돈 낼게요. 칠천원 있어요."

"됐다니까. 엄마, 그냥 받지 말자니까요."

"손님 없는 연극한지가 벌써 몇달인데?"

"아니….“


지갑에서 오천원 짜리 지폐 한 장과 천원 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든 나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에 지폐들을 건넸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다가 지폐를 받아들어 앞치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마워요. 그나저나 학생 되게 착하게 생겼네.“


나는 어색하고 웃다가 다시 곰 인형 옆으로 돌아갔다. 멜빵 바지 아저씨는 거즈와 의료용 테이프를 크기에 맞게 잘라둔 상태였다.


"저기… 몇 살이에요?"

"열여섯 살이요."

"어, 나랑 똑같다.“


나는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곰 인형과 대화를 나눴다. 곰 인형이 나와 나이가 같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위로를 받았다.


"그럼 우리 친구네.“


곰 인형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친구. 이전에 지수와 함께 연수를 만났을 때, 연수가 학원에서 두 살이나 많은 언니에게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른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유를 물으니, 연수는 유창하게 영어 몇 마디를 하더니 나이가 같아야만 친구로 취급하는 건 한국만 그렇다고 얘기해줬다.


반대로 곰 인형과 내가 단지 나이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된다는 것도 한국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연수와 지수를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크게 울렁였다.


"많이 아파요?"

"아뇨, 괜찮아요.“


내 표정이 잠시 어두운 걸 눈치챈 건지 멜빵 바지 아저씨가 걱정스레 물었다. 표정 없는 인형탈로 내 안부를 묻는 아저씨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탈 안에 어떤 얼굴이 있을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아저씨의 감정이 어느정도 읽히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내 다리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기 때문인지, 수전증이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곰 인형과는 달리 앞치마를 입은 아주머니와 멜빵 바지 아저씨는 손이 자유로웠다.


"저 분이 너네 엄마야?"

"응. 우리 엄마."

"우와, 신기해."

"뭐가?“


곰 인형과 나의 대화를 듣더니 멜빵 바지 아저씨가 껄껄 웃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얘 아빠인데."

"진짜요? 그럼 가족끼리 다 같이 연극을 하는 거예요?"

"그런 셈이지.“


멜빵 바지 아저씨는 다시 한 번 웃음 소리를 냈다. 아저씨의 웃음에는 거친 숨소리와 쇳소리가 섞여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아저씨가 갑자기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은 점점 빨라졌고 아저씨는 가슴을 두드리며 인형 탈을 벗어던졌다. 나는 기침을 하는 아저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동그랗고 푸근한 얼굴형이었다.


"그러니까 담배를 끊어야 한다니까요."

"에헥, 컥, 컥컥. 담배 때문에 그런 거 아니래도.“


곰 인형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기침을 연거푸하는 아저씨를 노려봤다. 이 좁은 공간 안에서 느껴지는 이런 분위기가 왠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이름이 뭐야?"

"나? 나는… 강아이."

"아이? 이름이 귀엽다."

"너는 이름이 뭐야?"

"나는 나무야. 윤나무."

"네 이름도 예쁘다.“


곰 인형의 이름은 나무였다. 나무….


나는 곰 인형이 자신의 이름과 엄청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무는 일단 키가 컸다. 마르고 길쭉해서 가만히 서 있으면 정말 커다란 나무가 옆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무의 말투가 정말로 한 그루의 나무 같았다. 여름의 강한 햇빛을 가려주는 무수한 잎을 가진 엄청난 높이의 나무. 바람이 불면 천천히 흔들리며 신비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그런 존재. 나무의 말투는 꼭 그런 느낌이었다.


"이제 곧 연극 시작이야."

"응, 준비해야지.“


아주머니가 입을 열자 아저씨가 재빠르게 다시 인형 탈을 뒤집어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삼십 분이 거의 다 됐다. 나는 나무의 옆구리를 슬그머니 붙잡았다.


"나는 가서 기다리면 돼?"

"응. 아까 들어오자마자 있었던 무대 앞에 의자에 앉아있으면 돼."

"저기, 연극은 무슨 내용이야?" 나무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직접 보여줄게. 미리 알려주면 재미 없으니까.“


나무는 아주머니와 아저씨 틈에 껴서 알록달록한 색깔의 무대 소품들을 바깥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그들을 도와야하나 싶어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가, 정신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무대가 있는 곳으로 나왔다. 무대의 조명은 잘못하면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대와 뒷공간을 왔다갔다하며 준비에 집중했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만큼 깜깜한 좌석들의 사이로 들어가 적당한 곳에 앉았다. 누군가가 들어오나 싶어 입구 쪽을 몇 번이나 돌아봤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일까, 아니면 원래 이렇게 보러오는 사람이 없는 걸까. 그러나 나무와 아주머니, 아저씨는 딱히 다른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어느 순간 무대의 조명이 완전히 꺼지고, 적막이 찾아왔다. 찌르는 듯한 파열음이 들리더니 커다란 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지지직거리는 불안정한 잡음과 함께 따뜻한 목소리가 섞여나왔다.


"나는 어릴 때부터 놀이공원의 왕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언젠가 놀이공원에 엄마 아빠와 함께 놀러 갔을 때, 화려하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 퍼레이드 행진을 하는 걸 봤다. 장난감 모형 말들이 이끄는 마차에는 왕관을 쓴 왕자가 앉아 있었다. 저기에 앉아있으면 이 놀이공원에서 평생 왕자로 살 수 있는 걸까?“


나무의 나레이션과 함께 무대의 조명이 켜졌다. 아까와 달리 나무는 유치원복을 입고 있었고, 무대 뒤에서 아주머니가 등장했다.


"나무야, 숙제 해야지. 너 저번에도 선생님한테 혼났잖아."

"숙제 안 하고 싶어요."

"뭐?"

"저는 숙제 같은 거 하기 싫어요. 엄마, 우리 놀이공원 또 놀러 가면 안 돼요?"

"지난주 주말에도 다녀왔잖아.“


연극은 그렇게 이어졌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나무와 아주머니, 아저씨는 엄청 훌륭한 연기로 무대를 이끌어갔다. 그들은 무대 뒤로 사라졌다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다른 역할을 연기하기도 했다. 아까 내가 봤던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연극의 주된 내용은 주인공인 나무가 놀이공원의 왕자가 되기 위해 집에서 몰래 빠져나가 놀이공원에 숨어 지내게 되는 이야기였다. 나무를 찾아 헤매던 나무의 부모님은 처음엔 나무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나무의 진짜 꿈을 알게 되고, 나무의 꿈을 함께 이뤄주기로 결심한다. 연극의 끝은 해피엔딩이었다. 무대에서 진지하게 연기를 하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으니 어릴 때 자주 읽었던 동화 몇 편이 떠올랐다.


"엄마, 나한테는 진짜 꿈이 있어요. 정말 이루고 싶은 꿈이에요.“


대사를 말할 때 나무의 눈은 더 크게 반짝였다.


연극이 끝나자 그들은 셋이 나란히 서서 관객석을 향해 인사를 했다. 오래된 극장이라 커튼은 닫히지 않았다. 조명 역시 꺼 줄 사람이 없었다. 나무와 아주머니, 아저씨는 조명이 켜진 무대에서 곧바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열심히 박수를 쳤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그런 나를 보더니 인형 탈을 벗고 능숙하게 손을 흔들며 허리를 숙였다. 그들은 곧 무대 뒤로 들어갔고, 잠시 후에 나무가 땀범벅이 된 채 내게 다가왔다.


"재밌었어?"

"응. 되게 재밌더라. 그리고 멋있었어. 연기하는 네 모습이랑 너희 부모님."

"그렇게 봐줘서 다행이다.“


나무의 얼굴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나무는 이마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나를 쳐다봤다.


"시간이 너무 늦었지? 집에 혼자 가면 안 될 것 같아."

"몇 시지?"

"밤 열한 시가 넘었어. 엄마 아빠랑 같이 너네 집까지 데려다 줄게. 어디 살아?“


나는 나무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바닥만 쳐다봤다. 내가 망설이자 나무는 눈썹을 움직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좀 그런가? 사는 곳 말해주는 거."

"아니야. …나 갈 곳이 없어."

"무슨 소리야?"

"집에서 나왔거든. 무대 위의 너처럼."

"왜 나온 거야?"

"그게… 설명하자면 좀 복잡해. 그냥 좀… 두려워서 나왔다고 해야 하나.“


두렵다는 나의 말에 나무는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나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집에서 학대를 당하는 그런 그림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네가 지금 생각하는 그건 아닐 거야."

"그럼 뭔데?"

"우리 집엔 다 낯선 사람들 뿐이야.“


나무가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나는 그걸 보다 조용히 웃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


그때, 아주머니가 무대 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무에게 소리쳤다. "얼른 와서 옷 갈아입어. 피곤해 죽겠네."

"그럼 우리 집에 같이 갈래?" 나무가 불쑥 내게 물었다.

"너희 집? …그래도 돼?"

"당연하지. 엄마랑 아빠도 찬성일 걸? 내가 말해볼게. 일단 여기서 기다려. 우리 여기 정리하고 나가야 하니까."

"응.“


나무는 관객석 틈을 빠르게 빠져나가 무대 뒤로 사라졌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이런 사연으로 나무의 집에 가게 되는게 마냥 즐겁지는 않았지만, 갈 곳이 없는 내게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여기가?“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말없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아저씨가 먼저 들어가 부스럭거리다 딸깍하는 소리를 내자 불이 켜졌다. 그때서야 사방에 놓인 인형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명의 바로 뒤에 있는 선반에 놓인 여러 개의 곰 인형들이 보였다. 인형들은 색이 바랜 분홍색의 털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밑에는 예쁜 상자에 포장된 바비 인형들이 여럿 놓여 있었다.


"아이고, 힘들다."

"얼른 와서 앉어.“


나무네 집은 놀이공원 안에 있는 인형 가게였다. 이곳에 들어오니 다시 한 번 꿈을 꾸는 기분이 들었다. 나무는 아무렇지 않게, 활짝 웃으며 나의 팔을 잡고 안으로 나를 이끌었다.


"여기는 거실."

"밥 먹자.“


아저씨가 다시 다른 쪽으로 이동하더니 딸깍 소리를 내며 불을 켰다. 그곳에는 가스 버너와 작은 냉장고, 테이블이 있었다. 아저씨가 냉장고 문을 열자 아주머니가 테이블 앞으로 걸어왔다. 테이블 밑에는 그릇들과 냄비, 후라이팬 같은 주방 도구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어째서 나무의 가족들이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그들이 혹시 이 놀이공원의 주인인 걸까? 어쩐지 옛날 동화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이 놀이공원과 나무의 가족은 꼭 닮아 있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버너의 가스불을 켜고 각자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요리는 김치찌개와 독특한 향이 나는 배추볶음이었다. 요리가 다 완성되자, 그들은 익숙하게 각자 할 일이 정해져있다는 듯 열심히 움직이며 테이블에 그릇들을 내려놓았다. 음식에서 따뜻한 김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릇이 이거밖에 없네. 괜찮지?"

"네, 괜찮아요.“


아주머니가 밥그릇이 아닌 작은 반찬 그릇에 밥을 산처럼 쌓아 내게 내밀었다. 작은 그릇에 꾸역꾸역 가득 담긴 밥의 모양새가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미소를 지었다. 모두들 밥을 먹기 시작했고, 나도 나무가 건네준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에 한가득 집어넣었다. 음식 냄새를 맡기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허기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한 순간에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나무의 가족은 아주 빠른 속도로 밥을 먹어치웠다. 내 속도는 훨씬 느렸지만 나무가 옆에서 나를 천천히 기다려주어 조바심 내지 않고 남은 밥에 계속 숟가락을 가져갔다. 밥을 다 먹은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가게 모퉁이에 있는 화장실에 그릇들을 옮기더니 곧바로 수세미를 들어 설거지를 시작했다. 아마도 그곳이 설거지를 하는 곳이자 욕실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하다가 나무를 쳐다봤다. 나무는 콧노래를 부르며 유리문 바깥을 보고 있었다. 나무의 시선을 따라 바깥을 바라봤지만 바깥엔 아무것도 없었다.


"뭘 보는 거야?"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거야. 하루가 끝나면 항상 멍하니 앉아있거든. 그럼 잠도 금방 오고 다음 날 아침에 별로 안 피곤하다.“


나무의 말을 듣고 나도 유리창 바깥의 허공을 응시했다. 나의 밥그릇도 어느새 깨끗하게 비워져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것. 참 이상한 취미라고 생각했지만 나무를 따라해보니 어째서 나무가 매일 밤에 이런 걸 반복하는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나무야. 나 뭐 물어봐도 돼?"

"뭔데?"

"너희 가족은 어째서 여기에서 사는 거야?"

"음. 여기가 우리 아빠 고향이래. 아빠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따라서 여기에 같이 출근하고 그랬었대. 할아버지가 이 놀이공원 매표소에서 일하셨다고 했거든."

"그럼 넌 태어날 때부터 여기 살았어?"

"아니, 나는 집이 자주 바뀌었어.“


나무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주 애기 때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여섯 살 쯤? 그때는 기억이 나. 벽지에 까맣게 곰팡이가 슬어있는 빌라에서 살았어. 벽지를 새로 바르고 아무리 닦아내도 곰팡이가 다시 피어나는 집이었지. 게다가 되게 좁았거든. 그러다가 초등학교 들어가고 나서 큰 주택으로 이사갔는데, 얼마 안 있다가 그 집에서 쫓겨났어."

"왜?"

"나도 정확한 건 모르지만… 엄마 말로는 우리가 더 이상 그 집에서 살 돈이 없댔어. 그래서 다 같이 찜질방이랑 아빠 친구의 집을 왔다갔다하다가… 아빠가 자기 고향으로 가보자고 했어. 그때부터 여기에서 살게 된 거야. 그래도 꽤 아늑하지? 난 여기가 좋아. 어릴 때부터 인형을 좋아했는데 여기는 내가 좋아하는게 가득하니까.“


나는 나무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쭉 둘러봤다. 나무의 말처럼 이곳에는 인형밖에 없었다. 나는 어쩐지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무는 이곳이 그저 좋은 것 같았다. 그러나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나무는 닫힌 문을 확인하고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내게 소근거렸다.


"사실 할아버지가 우리 아빠 이름으로 사기를 당해서 빚을 졌대. 그걸 우리가 떠안게 돼서 집을 팔아야만 했던 거랬어.“


나무는 손바닥으로 입을 반쯤 가리고 내게 속삭였다. 내가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자, 나무는 "엄마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엄청 싫어하셔. 이 얘기만 하면 엄마랑 아빠랑 싸워서…."하고 말 끝을 얼버무렸다. 나무의 표정은 어느새 시무룩해져 있었다. 나무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다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너희 가족은 정말 다 좋으신 분들 같아. 나무 너도 그렇고."

"왜 그렇게 생각해?"

"사소한 거 하나하나에서 다 느껴져. 예를 들면, 내 다리에 난 상처를 보고 바로 도와줬던 것도 그렇고. 아주머니랑 아저씨도 내가 갈 곳이 없다니까 집으로 와도 괜찮다고 하셨잖아. 내가 어떤 애인지도 모르시면서."

"너 나쁜 애야?“


나무는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도 나무와 같이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지 않았다. 애매한 표정 그대로 얼굴이 굳어버린 나를 보던 나무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내가 보기에도 너 착하고 좋아보여."

"내가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잖아."

"이상한 사람이 뭐야?"

"뭐, 미쳐있다거나 매일 이상한 상상만 하면서 살지도."

"그게 뭐가 어때서? 원래 사람들은 이상한 상상 자주 하잖아."

"그런가?“


나무의 말투는 무척 따뜻했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나무는 평생 내 편이 되어줄 것처럼, 어쩌면 내 친구가 되어줄 것처럼 웃어줬다.


나는 친구가 있다는 기분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줄곧 친구가 없었던 건 아마도 내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향한 보이지 않는 증오와 괴롭힘의 기억은 자꾸만 내 안의 문제점을 찾게 만들었다. 나를 바라보던 지수와 연수의 마지막 얼굴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게는 문제가 있어.


"나한테는 문제가 있어."

"누가 그래?"

"다들."

"내가 보기엔 안 그래."

"아냐. 사람들은 날 싫어해."

"그건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지.“


나무는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말했다. 그 사이에 목욕까지 마친 아저씨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아저씨는 인형이 가득한 선반의 틈새에서 작은 로션통을 꺼내 로션을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다. 나무는 여전히 날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아저씨가 로션 바르는 걸 아무런 생각없이 계속 바라봤다. 곧이어 아주머니도 화장실 문을 닫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주머니의 머리에는 마치 터번처럼 수건이 둘러져 있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화장실에서 나온 이후로 나무와 나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무는 내게 할 말이 더 있는 것처럼 나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내 옆에 앉아있었다.


"아이 너, 자고 싶은데서 이거 깔고 자.“


아주머니가 내게 두툼한 담요 두 장을 건넸다. "손님이 온 적은 처음이라 마땅한 이불이 없어." 나는 아주머니에게 괜찮다는 표시로 웃음을 보이고는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누워있는 곳에서 다섯 발자국 쯤 떨어진 곳에 담요를 펼쳤다.


가게의 바닥이 타일로 되어있어서인지 담요가 두툼했지만 딱딱한 바닥에 닿은 몸이 아팠다. 베개도 없었다. 머리에 닿은 차갑고 딱딱한 촉감이 익숙지 않아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불이 꺼진 가게의 어둠 사이로 유리창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맞은 편 놀이기구 간판의 빛이 보였다. 그 빛이 닿은 유리창의 끝에서 나무가 천천히 아주머니와 아저씨 곁에 이불을 깔고 눕는 것이 보였다. 내쪽에는 빛이 없어 나무는 날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잠자코 누워있다가 몸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잘 자, 아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창에 비친 나무는 내가 벌써 잠에 빠진 줄 알았는지 잠시동안 그대로 나를 바라보다 자리에 다시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규칙적인 코골이 소리에 집중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불안해질 것만 같았다.


"아이야, 자?"

"…응?“


어둠 속에서 부스럭하는 소리와 어렴풋이 가늘게 나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피곤에 절어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뜨니 눈 앞에 곧바로 유리창이 보였다. 막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의 푸르스름한 빛이 아주 얕게 하늘에 깔려있었다. 이른 아침에 가까운 새벽이겠거니, 생각하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무가 다리를 끌어안고 쭈그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움찔하고 움직였다.


"안 자고 뭐해?"

"머리가 아파서 잠이 안 와."

"아주머니나 아저씨 깨워서 약 찾아달라고 해야하는 거 아냐?"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나무는 내 옆에 누웠다. 한숨을 쉬는 나무의 얼굴이 어둠 속에 갇혀 선명히 보이지 않았다.


"있잖아. 아이 너는 널 곤경에 빠뜨린 사람도 사랑할 수 있어?"

"날 곤경에 빠뜨린 사람?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봐?"

"우리 아빠 말이야.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 가족이 집에서 쫓겨났는데도 여전히 할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하셔. 그리고 그거 때문에 엄마랑 자꾸 싸우거든."

"할아버지는 어디 계셔?“


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무는 이내 고개를 양쪽으로 저었다.


"돌아가셨어."

"돌아가셨으면 이젠 볼 일이 없는 거잖아."

"이 놀이공원도 그렇고, 인형극도 그렇고 사실 할아버지 때문에 하는 거야. 할아버지가 아빠한테 자주 여기에서 하던 인형극 이야기를 들려 주셨대. 아빠는 그게 그리워서 여기에서 다시 모든 걸 시작하고 싶다고 했어."

"어릴 때의 기억이 아주 좋았던 게 아닐까? 너희 할아버지가 어떤 이유로 그런 짓을 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희 아빠랑 함께 하실 때 다정하고 좋은 분이셔서 그런 걸지도 몰라. 넌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있어?"

"난 없어.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각자 사정이 좋지 않아서 떨어져 살았다고 했어."

"그럼 너도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구나…."

"엄마랑 아빠가 싸우면 심장이 빨리 뛰거든.“


나무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린채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런 나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넌 인형극하는게 좋아?"

"당연하지. 연극할 때가 제일 행복해. 대본쓰는 것도 좋고. 엄마 아빠랑 같이 하는 것도 진짜 좋아.“


나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게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라는 존재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만나본 적도, 전화 한 통 해본 적도 없었다. 친구들에게 할아버지나 할머니 얘기를 들으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엄마와 아빠를 제외한 가족이라는 걸 가진 건 어떤 기분일까.


엄마는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일찍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외국에 살고 계신다고 했었다. 몇년 후에 다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 대해 물었을 때 엄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두 분은 이미 돌아가셨다는 대답을 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묻고 싶었지만 그땐 묻지 못했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거겠지, 하고 넘겼으니까.


그게 전부였다. 나는 그들의 묘에 가본 적도 없었다.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네. 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다른 건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

"아이 넌 안 행복해?“


순진한 얼굴로 내게 묻는 나무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까보다 조금 더 밝아진 하늘 덕분에 가게의 내부도 좀 더 선명히 보였다.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있는 기분은 어떤 기분이야?“


나는 나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나무에게 던졌다.


"글쎄, 어떤 기분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나도 잘 모르겠어."

"…하긴. 원래부터 있었던 쪽이랑 원래부터 없었던 쪽은 서로를 절대 모르겠지, 아마."

"넌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없어?“

"있었을 지도 몰라. 근데 난 만나본 적도 없고,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어.“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 어떤 말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너희 가족이 부러워. 이렇게 다 같이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게, 뭔가 행복해보여."

"…집에서 나온 이유 더 자세히 물어봐도 돼?“


나무는 내 옆에 조용히 누웠다. 나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 명확히 느껴졌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무와 눈을 마주치면, 어떻게 말해야할지 고민도 하지 못하고 머릿속에 있는 복잡한 생각들이 두서없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나무야. 내 얘기 듣고 내가 미친 것 같다고 생각이 들면 나한테 미쳤다고 해도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그때서야 나무의 눈을 바라봤다.


"너가 정말 순수한 애인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내가 집에서 나온 이유가 뭐냐면, …아무래도 엄마랑 아빠가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랬어."

"사람이 아니라고? 무슨 소리야?"

"로봇인 것 같아. 인공지능 로봇."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우리 엄마는 얼굴이 없어. 표정이 없거든. 그리고 아빠는….“


나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도 떠올렸다. 아빠의 눈에서 나오던 빛과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였던 그 밤. 엄마의 표정과 아빠의 표정은 그 이후로도 늘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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