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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Oct 21. 2024

[장편소설] 원더랜드와 초록색 꽃(4)

그들은 밀랍 인형 같았다. 밥을 먹다가 가슴이 콱 막혀 가끔 허공을 보고 눈물을 머금을 때도, 설거지를 하던 엄마를 옆에서 빤히 바라볼 때도 그들은 나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내가 그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엄마의 손은 늘 차가웠고 아빠는 날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다.


"…아무튼 우리 엄마 아빠는 아마 밀랍 인형으로 만들어진 인공지능일 지도 몰라. …아빠의 책상에서 관련된 자료를 읽었어. 인공지능에 대해서. 그러니까, 아예 인간 사회에 파고들어서 인간처럼 살아가는 그런 인공지능 말이야. 그 자료에서는 그렇게 나와있더라고. 인공지능이 정말 이 세상에서 유용하게 잘 쓰이려면, 인간이 하지 못하는, 인간이 하기에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곳에 사용하려면 인공지능이 정말 인간 같아보여야 한다고. 그런데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뭔데?“


"수명과 노화 같은 문제야. 인간은 누구나 언제든지 다 죽지. 또 죽기 위해서 하루하루 늙어가잖아. 근데 인공지능, 로봇은 그렇지 않아. 특히나 효율성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아주 단순한 모양의 인공지능 로봇이라면.“


"그럼 인공지능에도 수명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네?“


"맞아. 기계에 수명을 설정하는 거야. 아빠의 책상에 놓여있던 자료에 그렇게 써 있었어. 인공지능에 수명을 설정해서 인간과 유사한 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러면 인공지능도 역시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행동들은 자신들이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래. 죽지 않는 존재, 살아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죽음과 반대되는 행동들을 사력을 다 해서 하는 거야.“


"그럼 너희 부모님은?“


나무의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여태까지의 이야기는 전부 상상과 가정에 불과한 말들이었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고, 그 상상 안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 그러나 실제로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우리 엄마 아빠가 정말로 로봇이라면, 인간이 아니라면, 그들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진실을 알려고 했을 때 왜 그들은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처럼 행동한 걸까?


"모르겠어. 우리 엄마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서워서 도망쳤다는 말. 아까 했던 말 있잖아. 그건 무슨 말이야?" 나무는 내 말에 곧바로 이어서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서 무서워. 진짜 날 태어나게 한 사람들은 대체 누군지, 난 아는게 없잖아. 나한테는 친구도 없고 엄마 아빠 말고는 가까운 사람이 없어. 근데 엄마 아빠가 정말로 인간이 아니라면 난 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할만큼 갑작스런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눈이 눈물로 가득 차 나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곧 묵직한 눈물들이 뚝뚝 떨어졌다. 나무는 나를 끌어안아줬다.


"엄마 아빠에게 더 의지하게 되기 전에 빠져 나오고 싶었어. 더 이상 기대고 싶지 않았어. 그랬다가는 나중에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너의 친구가 될게.“


나무는 계속해서 내 등을 두드렸다.


"아무도 없는 게 아니야. 우리 엄마랑 아빠도 너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거야."

"집에서 나오긴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

"다시 집으로 가보는 건?"

"집으로…?"

"확실하게 확인을 해야하니까. 너희 부모님이 정말 로봇인지. 그걸 확인하지 않으면 진짜 부모님이 존재하는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잖아. 그리고 네 진짜 부모님이 있다면, 그거에 대해서도 알아봐야하잖아.“


나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해낸 것은 도망치는 것 뿐이었다. 그날의 기억에 대해 묻는 아빠의 질문에도 모르는 척 도망쳤고, 지수에 대한 내 마음 때문에 엄마와 아빠가 로봇이라는 의심을 하게 된 사실로부터도 도망쳤다. 그들을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나무의 말대로 해야만 했다. 엄마와 아빠에게서 무언가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나의 진짜 엄마 아빠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집에 돌아가보기로 나무와 약속했다. 아빠의 서재와 노트북을 뒤지든, 엄마와 아빠에게 직접 물어보든.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


해가 완전히 올라와 푸른 빛이 가실 때쯤, 나무와 나는 가게에서 나왔다. 아주머니와 아저씨께도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후에 인사를 나눴다.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나무에게 학교에 가야하지 않냐고 물었는데, 나무는 자신은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왜 학교에 안 가?"

"나는 집에서 공부하거든. 초등학교까지만 다녔어.“


그러면서 나무는 구석의 작은 테이블 아래에 쌓인 교과서와 문제집들을 보여줬다.


"학교를 가지 않더라도 공부는 해야해. 검정고시도 봐야하고. 무엇보다도 나는 나중에 대학에 가려고 하거든. 배우고 싶은게 있어."

"배우고 싶은게 뭐야?"

"연극.“


나무는 웃었다. 연극을 배우는 일은 나무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무대 위에서의 나무의 모습은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학교 안 가도 돼서 좋겠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골목길은 쓸쓸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그러나 오래된 길을 빠져나와 복잡한 거리로 접어들자 수많은 차와 버스들, 서류 가방이나 백팩을 메고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정신없이 이곳 저곳으로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이 혼란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나무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놀이공원에서도, 오래된 집들이 가득한 골목에서도, 번잡한 도시의 거리에서도 나무는 늘 같은 얼굴이었다.


"학교를 꼭 가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다 자기 방식이 있는 거니까.“


혼자서 한참을 생각하는 것 같더니 나무가 내게 말했다.


나무가 살아가는 방식이 어쩌면 내가 가장 바라던 삶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격태격해도 따뜻한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 그리고 지긋지긋한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가득한 학교에 가지 않는 것.


언제부턴가 등교길을 걸어가면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주말 밤에는 월요일에 학교에 가야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초조해지기도 했다. 엄마가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이후로 이런 괴로움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이런 고통을 매일 겪어가면서 배워야 할 가치있는 것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다. 학교는 내게 지옥 그 자체였다.


나무를 보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나무는 내가 여태 봤던 많은 사람들하고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나무와 비슷해지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나도 내가 원하는대로 학교를 다니지 않고서도 아무 문제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집 근처에 도착해서 서로에게 밝게 인사했다.

"언제든지 도와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고마워.“


나무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끼워넣고 천천히 뒤돌아서 걸어갔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우리 집에서 더 이상 지낼 수 없게 되면 나무의 집에 들어가기로 약속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도 무슨 일이 생기면 참지 말고 여기로 오라고, 조금은 거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날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 특유의 습관적인 말투였다. 나무의 가족과의 약속이 내게는 커다란 용기가 되어주었다.


현관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을 왔다 갔다 서성이던 엄마가 내게 곧바로 뛰어왔다.


"어디 갔었어! 응?"

엄마는 나의 두 손목을 꽉 잡고 나를 꾸짖었다. 그런 엄마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엄마를 끌어안았다. 나는 아직 엄마보다 키가 많이 작았다. 엄마를 끌어안은 나의 턱이 엄마의 어깨 쪽에 부딪혔다. 엄마의 몸은 차갑고 딱딱했다.


"밤 열시 이후에는 밖에 나가면 안 돼."

"왜?"

"왜긴 왜야, 위험하니까 그렇지. 밤 늦게 밖에 나갔다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범죄 사건 대부분이 밤에 일어난다고.“


내가 엄마를 있는 힘껏 끌어안는데도 엄마는 나를 결코 안아주지 않았다. 그저 내 귀에 대고 복잡한 잔소리들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목소리를 한참 듣고 있다가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그런 나의 뒤에서 끊임없이 말을 뱉어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집을 나오기 전 먹어치웠던 그릇들은 흔적도 없이 치워지고 없었고, 침대 역시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깔끔하게 펼쳐진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 차가웠던 몸에 점점 온기가 돌았다. 가게에서 담요를 깔고 누워 잠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푹신하고 따뜻했는데도 졸음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학교 가야지.“


삼십 분 정도 누워있었을까. 갑자기 벌컥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엄마가 가까이 다가왔다.


"학교 안 갈래요."

"무슨 소리야? 학교를 왜 안 가."

"가고 싶지 않으니까."

"학교는 가고 싶지 않다고 안 갈 수 있는데가 아니야."

"나도 알아요."

"근데 어째서 안 가겠다는 거야?“


나는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춰내고 엄마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엄마는 내가 학교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어요?"

"무슨 말이야?"

"내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고 있냐구요!“


내가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나자 엄마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엄마의 동공이 강하게 흔들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는 엄마의 흔들리는 눈을 보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섰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아무것도…. 학교에서 친구들이 나 괴롭혀서 울면서 집에 들어왔을 때도, 그거 때문에 몸이 아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때도 엄마는 몰랐잖아요. 내가 왜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하는지 진짜로 궁금해한 적 있어요?“

"…몰랐어.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엄마의 동공이 더 심하게 울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눈동자가 기이한 모양으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눈동자만을 쳐다보며 엄마의 몸에 더 바싹 다가서자, 엄마가 뒤로 물러서며 내 팔을 잡았다.


"엄마가 다 해결해줄 수 있어. 응? 일단 진정하고 같이 생각해보자.“


나의 팔을 세게 붙잡는 엄마의 손길을 있는 힘껏 뿌리쳤다. 그러자 엄마가 저항없이 바닥에 쓰러져 주저앉았다. 쿵, 하고 큰 소리가 바닥에 울렸고, 엄마는 주저앉아 고개를 숙인 채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진정하고 같이 생각해보자. 응? 진정해… 제발."

"나 엄마랑 아빠가 숨기는 게 뭔지 다 알고 있어요.“


계속해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엄마를 뒤로하고 방문을 나섰다. 내가 빠른 속도로 엄마에게서 멀어지자 뒤에서 두어번의 마찰음이 또다시 들려왔다. 엄마는 다리를 일으키지 못하고 엎드린 채 바닥에 양 손바닥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마치 바닥을 기어가는 것처럼, 손톱으로 바닥을 긁는 것처럼 팔만 움직였다.


나는 그런 엄마를 뒤로 하고 아빠의 서재를 향해 뛰어갔다. 아빠는 이미 출근하고 집에 없었고 엄마는 당장 빠르게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아보였다. 만약 내게 기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나는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갔다.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 무수한 책들과 눈앞의 컴퓨터였다. 아빠의 책상은 정리된 채 깨끗했고 지난 번 봤던 서류들은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당장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문의 바깥 쪽에서 덜그덕하며 엄마가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빠질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리는 문고리를 보고 있으니 숨이 점점 가빠져왔다.


컴퓨터의 전원을 켜자마자 깔끔하게 정리된 폴더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이름으로 적힌 폴더들이 대부분이었다. 순서대로 하나하나 눌러봤지만, 대부분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작성된 업무 파일이었다. 영어나 독일어로 적힌 파일들도 많았다.


"아이야. 강아이!“


밖에서 엄마가 큰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곧이어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가 여보 서재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어요."

아빠에게 전화하는 소리였다. 아빠가 일하는 곳은 집에서 차로 운전하면 이십 분 정도 걸리는 위치였다. 아빠는 평소에도 무슨 일이 있으면 곧장 집으로 오곤 했기 때문에, 만약 별다른 일이 없다면 아빠가 곧바로 집으로 찾아올 것이다. 지금은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 차가 막히지도 않을테니 주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길면 삼십 분에서 사십 분. 그 안에 필요한 정보들을 찾아내야만 했다. 나의 엄마 아빠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태어났는지. 또 나의 진짜 부모님이 누구인지. 모든 걸 알아내야만 했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엄마의 통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정확한 발음으로 내가 오늘 저지른 짓에 대해서 아빠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십 분 정도 지났을까. 모든 폴더를 열어 최대한 빠르게 여러 파일들을 훑어보는데도 불구하고 나에 대해서나 엄마, 아빠에 관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 아빠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에 관한 논문이나 서류들이었다. 두통이 시작되던 찰나, 바탕화면의 폴더들 사이에 위치한 '프로젝트 B'라고 되어 있는 폴더를 눌렀다. 방금 확인했던 폴더의 이름이 '프로젝트 A'였지만 내가 알 수 없는 진행 사업, 주제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역시 비슷한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확인을 안 하기엔 미심쩍어 빠르게 폴더 안의 파일 제목들을 훑어봤다.


'프로젝트 B'의 폴더 안에는 파일이 없었고 또 다른 하위 폴더가 있었다. 그 하위 폴더의 이름은 'Fam'이었다. 폴더를 더블 클릭하자마자 작은 크기의 사진들이 셀 수 없을만큼 많이 보였다.


미리보기로 보이는 작은 크기의 사진들은 대부분 우리 가족의 사진이었다. 내가 아주 어릴때,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의 사진이 첫 시작이었다. 비슷한 배경에서 비슷한 구도로 찍힌 사진들이 몇장의 간격을 두고 보였고 그 사진을 시작점으로 해당 시기의 다양한 사진들이 나열되어있는 듯 했다.


맨 처음 찍힌 사진들의 시기는 내가 걸음마를 떼기도 전인 것 같았다. 마치 사진관에서 찍은 것처럼 보이는 첫 장을 시작으로, 바닥을 기어 다니는 나의 어릴 때의 사진들과 나와 함께 있는 엄마, 아빠의 사진들이 몇 장 이어졌다. 그 다음 사진은 걸음을 걷기 시작할 때 즈음인 것 같았다. 역시 사진관에서 찍은 것 같이 깔끔한 구도로 찍힌 사진을 시작으로 유아차를 타고 있는 사진, 공원에서 돗자리를 깔고 함께 누워있는 사진 등이 있었다.


마우스의 휠을 조금 밑으로 내리자 유치원복을 입고 있는 내가 보였다. 엄마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고 있는 사진과 유치원에서 장기자랑을 하는 사진도 있었다. 사진은 그런 식으로 몇장씩 이어지다 일정한 구도로 찍힌 새로운 사진으로 시작되어, 새로운 시기를 쭉 보여줬다.


마우스 휠을 더 길게 내려서 폴더의 끝까지 내려가자 정체불명의 메모장 파일과 사진의 마지막 부분이 보였다.


마지막 사진은 얼마 전, 엄마 아빠와 함께 갔던 식당에서 찍힌 사진이었다. 몇 장 더 전으로 올라가자 중학교 입학식 사진도 보였다. 사진 속의 나는 조금 큰 사이즈의 교복을 입고 어수룩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전의 사진을 보니, 아마도 사진들은 2년의 주기를 가지고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것 같았다. 가장 마지막에 찍힌 사진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찍은 -마치 사진관에서 찍은 것 같은 구도의-사진이었고, 그 직전에 찍힌 동일한 구도의 사진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나와 엄마, 아빠의 옷차림이 다 함께 놀이공원에 갔던 날의 옷차림이었기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상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이런 사진들을 찍은 기억이 전혀 없었다. 아주 어릴 때라면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당연하지만, 당장 얼마 전에 찍힌 최근의 사진들 역시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마치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진들은 2년 주기 시기의 첫 장인 사진관 구도의 사진을 제외하면 찍힌 구도가 전부 특이했다. 아니, 특이하다기보다는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몰래 촬영한 것 같은 구도의 사진들도 여럿 있었고, 누군가의 시선 그 자체처럼 느껴지는 사진들도 있었다. 특히 가장 마지막에 저장되어있던 식당에서 찍은 사진은 정말로 이상했다. 그 사진에는 나와 엄마가 담겨있었다. 우리는 사진을 촬영하는 걸 아예 모르는 사람들처럼 밥을 먹고 있었다. 카메라가 있어야 할 자리에 카메라가 있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는 사진을 이곳저곳 점을 찍어 그 부분을 확대했다. 이 사진은 가장 최근의 사진인 데다가 당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날이기 때문에 무언가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꼼꼼히 살폈다.


그때, 어떤 희미한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들고 있는 숟가락이었다. 숟가락에 무언가가 비쳐있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최대한 확대해봤지만, 숟가락의 왜곡된 단면 때문에 형체를 한눈에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숟가락의 각도가 맞은 편의 사진 찍는 위치를 정확히 반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인상을 쓰고 그 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이야!“


숟가락에 비친 형체는 아빠였다. 그게 전부였다. 그 외에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아빠의 모습이 옆으로 길게 왜곡되어 있었지만, 아빠가 아무것도 들고 있지도, 어떤 행동을 하고 있지도 않고 있다는 건 분명히 보였다. 아빠는 그저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강아이!“


엄마가 나를 부르며 다시 한 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고리가 강하게 흔들렸다. 마치 곧 열릴 것처럼 흔들리는 문고리에 놀라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철컥.


바깥에서 익숙한 문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폴더의 마지막에 있던 메모장 파일을 클릭했다. 메모장 파일의 이름은 규칙이 없는 알파벳과 기호들의 조합으로 되어있었다. 열린 파일의 첫 단락도 복잡한 코드로 가득했다. 첫 단락 이후 긴 공백이 이어졌다.

바깥에서는 문고리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한 번 더 크게 들렸다.


나는 빠르게 마우스 휠을 돌려 파일의 아래로 향했다.


-일련번호: AC195BBR0-198340

-등록된 이름: 강 우 석

-버전: EOr 18.1.3


메모장 파일의 끄트머리에는 알 수 없는 말들이 가득했다. 내가 알아 들을 수 있는 글자는 '강우석' 단 세 글자였다. 강우석은 아빠의 이름이었다. 나는 입술을 이로 물어 뜯으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카메라를 켜서 몇 장이나 사진을 찍었지만 제대로 나온 사진은 단 한 장 뿐이었다. 손이 심하게 떨렸다.


사진을 확인한 후 그 다음의 파일을 바로 열었다. 이미 확인한 파일처럼 역시 첫 단락에는 복잡한 코드들이 가득했고, 공백을 넘겨 밑으로 쭉 내리자 동일한 형식의 문자가 적혀있었다.


-일련번호: AB298QOP3-293485

-등록된 이름: 차 지 혜

-버전: EOr 18.1


그때, 바깥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고리에서 강한 마찰 소리가 들렸다. 열쇠를 꽂는 소리 같았다. 곧이어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아빠가 들어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빠르게 열려있던 모든 파일과 폴더를 닫았다. 아빠는 커다란 보폭으로 금방 내 앞까지 다가왔다. 점점 더 심하게 떨리는 손은 책상 밑으로 감췄다. 아빠의 뒤에서는 엄마가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뭐하니, 여기서?“


아빠의 목소리가 유독 차가웠다. 나는 아빠의 눈을 천천히 바라봤다. 아까 엄마의 모습과 달리, 아빠의 눈은 한치의 흔들림 없이 나의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확인할 게 있었어요."

"뭘 확인해?"

"아빠는 몰라도 돼요.“


나는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 아빠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아빠가 강한 힘으로 내 손목을 낚아채 나를 돌려세웠다. 피부가 강하게 마찰되는 통증과 함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더 크게 뛰기 시작했다.


"아파요."

"여기서 뭐했는지 대답해."

"싫어요.“


아빠는 대답없이 나를 노려봤다. 나 역시 아빠의 눈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인지 숨이 점점 가빠졌다. 아빠를 노려보는 그 짧은 순간동안 숨이 가득 차올라 나는 입 밖으로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네 방으로 올라가자. 가서 얘기하자.“


그 순간, 아빠의 눈에서 찰나의 작은 빛이 보였다. 아주 잠깐동안이었다. 그 잠깐이 지나자마자 아빠의 눈은 금방 부드러워졌고, 내 손목을 잡은 힘도 약해졌다. 순간의 모습이 나의 착각인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될 정도로 아빠의 변화는 자연스러웠다.


나는 나를 방으로 이끄는 아빠의 손길에 잠자코 따라갔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방으로 함께 올라가는 것 말고는 별 다른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옛날의 그 기억과 상당히 유사했다.


아빠는 내가 마치 아주 작은 아이인 것처럼 나를 침대에 눕혔다. 분명히 방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아주 가빴던 숨이 어느새 진정되어 있었다. 마치 잠에 빠져들기 직전의 숨처럼.


어딘가로부터 바나나향이 느껴졌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아주 은은한 바나나향이 코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정신이 점점 흐려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반대로, 그날의 기억은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지고 있었다.


"아이 너 어제까지도 많이 아팠잖아. 그치? 약 먹고 자면 괜찮아질 거야.“


날 눕히고 침대의 옆자리에 앉은 아빠가 주머니에서 작은 사이즈의 병을 꺼냈다. 그날 봤던 것과 똑같은 병이었다. 바나나향의 액체가 들어있는 병. 그때서야 시야가 다시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이미지들이 서서히 겹쳐졌다.


아빠가 나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시선을 돌렸다.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인 메모지와 볼펜이 보였다. 며칠 전 밤에 무언가를 끄적이다 둔 것들이었다.


아빠는 내 입에 갈색병을 들이밀었다. 뚜껑이 열린 병 안에서 강한 냄새가 풍겼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달리, 가까이에서 맡은 정체불명의 액체의 향은 지독했다. 기억하고 있던 바나나향이 맞긴 했지만 향의 농도가 매우 짙어 달콤함을 훨씬 넘어서 독하다는 느낌이었다. 진한 달콤함 뒤에는 느끼하고 인공적인 향이 순간적으로 두통을 유발했다.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빠가 병의 입구를 내 입술까지 가져왔을 때, 나는 벌떡 일어나 볼펜을 주워들었다. 내가 일어나는 반동에 의해 병은 바깥으로 나가떨어졌고, 묵직한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액체들이 넓게 뿌려졌다. 진한 초록색의 액체가 바닥에 흥건해 있었다. 파열음을 들었는지 엄마가 놀라서 뛰어왔고, 바닥에 쏟아져있는 액체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뒤돌아서 사라져버렸다.


점점 옆으로 흘러가는 액체를 바라보다가 아빠를 바라봤을 땐, 아빠의 가슴에서 초록색의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가 폭발하듯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분수처럼 솟아 나오는 액체로 인해 아빠의 가슴팍은 서서히 벌어졌고, 사선으로 쭉 그어진 상처는 원래의 길이보다 점점 더 길어졌다. 고개를 흔들고 내 손을 바라보자 손에 들린 볼펜에 초록색 액체가 가득 묻어있었다.


"이게… 뭐야?“


떨리는 목소리로 아빠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지만 아빠는 대답이 없었다. 아빠는 눈을 뜬 채로 서서히 멀어지더니 뒤로 쿵, 하고 떨어졌다. 그 순간 폭발음이 들리며 더욱 거세게 초록색 액체가 몸에서 뿜어져나왔다.


그런 상태는 몇 초간 지속되더니 곧 끝나버렸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바닥에 흥건한 물기를 남긴 채 아빠의 몸은 그대로 멈췄다. 더 이상 액체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아빠에게 다가갔다. 끈적한 액체가 양말에 스며 들어 발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발가락 사이로 엉겨 붙었다.


상처는 성인의 팔뚝 길이만큼이나 길게 벌어져 있었다. 상처의 표면에는 초록색 액체가 끈적하게 남아있었고, 그 사이로 이상한 것들이, 난생 처음 보는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나는 양 손으로 상처를 주욱 벌렸다. 얇은 살과 그 밑의 초록색 근육들이 끈적한 소리를 내며 넓게 벌어졌다.


아빠 몸의 내부는 기계 장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눈으로 보고 있었음에도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을 손가락으로 만져봤다. 분명했다. 손 끝에 닿는 것들은 딱딱하고 조악한 표면들이었다. 나는 고개를 더 들이밀고 자세히 내부를 관찰했다. 부품들이 복잡하게 얽힌 아주 얇은 선들로 인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선 하나를 빼자 안에서 몇 개의 작은 부품들이 힘없이 빠져나왔다. 나는 그 부품들을 대충 이불에 닦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몇 번, 몇 개의 선을 뽑아냈다. 처음에 무작정 주머니에 담았던 부품들과 똑같이 생긴 부품들이 계속 빠져나와 더 이상 챙길 수가 없었다. 작은 부품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계속해서 선을 찾았다.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선들에도 몇 가지의 색깔이 있었다. 가장 많은 건 검은색이었고, 두번째로 많은 건 초록색, 가장 개수가 적은 건 빨간색이었다. 빨간색은 눈으로 보고 그 개수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일단 가슴팍의 넓은 부위에는 여섯개가 전부였다.


나는 입을 앙다물고 빨간색 선을 전부 끊어냈다. 그러자 모든 선들이 힘없이 늘어지며 연결되어있던 부품들이 전부 아빠의 몸 속으로 힘없이 떨어져 굴러갔다. 남은 건 심장 쪽에 위치한 네모난 상자 모양의 연결부 세 개 뿐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끼워둔 것처럼 작은 뚜껑과 틈이 보였다. 한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아주 작게 파인 곳을 발견했다. 볼펜의 촉으로 파인 곳을 꾹 누르자, 세 개의 뚜껑들이 모조리 열렸다.


그 안에는 칩이 세 개 들어있었다.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크기의 칩들이었다. 나는 손톱으로 칩들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아빠는 눈을 뜬 채 고개를 돌리고 차갑게 누워있었다.


"아이야, 너 지금…."

"…엄마."

"너 뭐하는 거야?"

"…응?…"

"너 지금 아빠를 죽인 거잖아."

"내가, 내가 죽, 였다구요?“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허공에 손을 뻗으며 엄마에게 서서히 다가서자 엄마는 점점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곧 엄마의 동공이 양 옆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이상했다. 빠르고 거칠게 움직이는 동공은 전자 기계 같았다.


"가까이 오지 마. 위험해.“


엄마는 차분한 목소리로 타이르면서도 내게서 더 멀어졌다. 내가 다가가길 멈추자, 엄마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런 엄마를 잠시동안 바라보다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신발에 발을 구겨넣었다. 축축하고 묵직한 발이 신발에 제대로 끼워넣어지지가 않았다. 양말은 초록색 액체로 젖어 기분 나쁘게 끈적였다.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내가 걸어온 바닥에 초록색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손에 쥔 볼펜에서는 여전히 초록색 액체가 떨어지고 있었다.


탁.


나는 놀라며 볼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볼펜은 가벼운 소리를 내며 굴러가다가 전신거울의 끄트머리에 부딪혀 멈췄다.


전신거울 속에는 초록색 액체로 몸을 가득 적신 텅 빈 얼굴의 내가 있었다.


3. 버려진 아이


거리를 걸었다. 대낮이라 번쩍이는 해가 거리 전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탁한 회색의 콘크리트 바닥이 햇빛을 반사해 눈이 시렸다. 다들 자신의 자리를 찾아 어딘가로 스며 들어있을 시간이었다. 거리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걷고 있으면 이따금씩 눈이 따가웠다. 그럴 때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면 눈꺼풀 사이에서 초록색 피가 묻어나왔다. 집에서 나오기 전 신발장 위에 놓여 있던 티슈케이스에서 티슈 몇 장을 뽑아 얼굴을 겨우 닦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나는 여전히 초록색 피를 가득 뒤집어 쓴 괴물이었다.


열심히 걷고 있다보면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나를 스쳐지나가며 한번씩 쳐다봤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더욱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지나쳐온 가게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수군대는 것 같았는데.


그들이 경찰이나 119를 부를까봐 겁이 났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헉, 헉, 하는 숨소리가 점점 빨라지자 입에서 피맛이 맴돌았다. 목구멍을 타고 빠르게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 때문에 목이 아팠다. 침을 몇 번이나 계속 삼켰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달리는 속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속도가 더 줄어들어 평범한 걸음걸이가 되었을 때, 주머니에 들린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디야?

"나 거의 다 왔어, 이제…“


눈 앞에 나무가 서 있었다. 나무는 내 모습을 보고 잠시 멈춰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나는 뒤늦게 옷에 잔뜩 묻은 초록색 액체들을 손바닥으로 닦아 내려 했지만, 이미 말라버린 액체들은 진한 초록색이 되어 옷에 눌러 붙어 있었다. 손톱을 세워 억지로 그것들을 긁어봤지만 잘 되지 않았다. 덜컥 눈물이 났다. 나무가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와 그런 나의 손을 꽉 잡았다.


"괜찮아?"

"…아니.“


나무가 손을 잡자 갑자기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무는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마.“


나무가 나를 안았다. 나무의 어깨에 고개가 닿자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서야 모든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환한 거리를 걷고 있던 방금까지는 마치 꿈 속에 갇혀있는 것 같았는데. 나무를 만난 것은 전부 상상일 뿐이고, 미치광이처럼 똑같은 기억에 시달리며 엄마와 아빠를 두려워하다 결국 아빠를 죽여버리고 마는 그런 악몽.


그러나 놀랍게도 모든 건 꿈이 아니었다. 나를 걱정하는 표정으로 서 있는 나무의 얼굴을 확인하자 모든 일이 비로소 현실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를 죽였어.“


나무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무가 입은 흰색 셔츠의 어깨 부분이 초록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때처럼 아빠가 나한테 이상한 걸 먹이려고 했어. 그래서… 그냥 먹지 않으려고 아빠의 팔을 뿌리친 줄로만 알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내가…내가 아빠를 죽였나봐. 그…탁상에 있던 볼펜으로 아빠를 찔렀나봐. 손에 볼펜이…들려있었어. …거기서 초록색 피가 뚝뚝 떨어졌어.“


나는 초록색 액체가 묻은 손가락 사이를 펼쳐 쳐다봤다.


"이거."

"그럼 이게 다 아빠 피야?"

"……응…. 이상해…. 초록색 피였어. 빨간색이 아니라."

"일단 가서 씻자.“


나무는 더러워진 나를, 나의 손을 잡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우리는 내가 지난 밤 걸었던 어둑한 골목으로 걸어갔다. 대낮에 본 골목은 생각보다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이곳의 사람들 역시 전부 일을 하러 가거나 학교에 간 건지 대부분의 집이 텅 비어있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나무에게 이끌려갔다. 골목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세게 부는 바람에 온몸이 휘청 흔들렸다. 그러자 느끼한 기름 냄새 같은 것이 느껴졌다. 몸에 말라붙은 초록색 피에서 나는 냄새였다.


*


"아주머니랑 아저씨는?"

"엄마랑 아빠는 낮에 일하러 가셔."

"무슨 일하시는데?"

"엄마는 편의점에서 알바하시고 아빠는 인형 만들러 가셔.“


나무는 가게의 한쪽 끝에 놓인 박스들을 가리켰다. 이 가게에서 유일하게 낡지 않은 인형들이 담긴 박스들이었다.


"아빠가 만든 인형들이야.“


아저씨가 만든 인형들은 정교하게 생긴 아기 인형이었다. 박스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인형들은 두 살 정도 되는 아기 같았다.


나무가 주는 수건과 옷을 가지고 화장실로 들어왔다. 원래 공용화장실로 쓰던 곳이라 창문이 꽤 크고 바닥이 아주 넓었다. 세면대 쪽에는 풀장처럼 생긴 간이 욕조가 있었고, 여러개의 세면대 중 한 개의 세면대에는 긴 샤워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세면대 앞으로 걸어가 거울에 비친 나를 봤다. 천천히 옷을 벗었다. 초록색 피가 옷 속까지 스며 들어 있었다. 그 흔적을 손으로 비벼보다가 기운이 빠져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타일 바닥이 몹시 차가웠다.


바닥을 기어가 샤워기를 틀자 넓은 바닥으로 수많은 작은 물방울들이 넓게 퍼졌다. 따뜻한 수증기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었다. 고개를 숙이고 한참 속을 게워냈는데도 구역질이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이제는 구역질을 할 힘 조차도 남아있지 않게 되자 몸이 떨리며 눈물이 터져나왔다. 커다란 화장실에 울음 소리가 가득 울렸다.


"아이야, 괜찮아?“


바깥에서 나무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괜찮다고 소리치면서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빠를 죽여버리다니.


아빠가 로봇이든 사람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빠를 찔렀고, 아빠는 분수 같은 피를 흘리며 죽었다. 그리고 나는 아빠의 내장을 헤집어 그 안에 들어있던 것들을 꺼내왔다. 거센 샤워 호스의 물줄기 아래에서 양손을 맞잡았다. 눈을 꽉 감고 무언가를 입으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주세요, 제발….


나는 진심으로 빌고 빌었다. 난 정말로 용서받고 싶은 걸까. 죄책감 때문에 이토록 끔찍한 걸까. 알 수 없었다. 그저 용서해달라는 기도는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오자 나무가 손톱을 입으로 물어 뜯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쓰러진 줄 알았어.“


시계를 보니 한 시간도 더 넘게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나는 나무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며 일부러 웃어보였다. 웃는 순간 눈물이 다시 울컥 치밀어서 입꼬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이런 모습을 나무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괜히 혼자 뒤돌아서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는 내게 나무가 드라이기를 내밀었다.


"괜찮으면 말려줄까?"

"응?"

"머리 말이야.“


나무가 손가락으로 나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머리카락을 털던 손이 멈추자 몇 초만에 머리칼의 끝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차가운 물방울들이 어깨로 떨어지자 피부의 작은 솜털들이 미세하게 솟아올랐다.


나는 나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는 익숙하게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며 뜨거운 바람을 여기저기로 흔들었다.


"엄마가 아침엔 항상 바빠서 내가 가끔 말려줘. 아빠는 머리가 짧아서 오랫동안 말릴 필요가 없지만 엄마는 아니거든. 엄마가 로션 바를 동안 엄마 머리 말리는게 내 일이야."

"엄마랑 아빠가 일하러 가시면 넌 뭘 해?"

"검정고시 공부하고 또… 새로운 인형극 내용도 구상하고. 글도 써.“


나무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금방 머리가 말랐다. 내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자, 나무가 내 손을 어깨 밑으로 내리더니 무언가를 가져왔다.


"이건 서비스.“


좋은 꽃의 향기가 나는 오일이었다. 나무가 그걸 손바닥에 쭉 짜더니, 내 머리카락에 발라줬다.


"너 꼭 언니 같다."

"그런가?"

"응. 옛날에 너 같은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언니랑 사이 좋은 친구가 있어서 부러웠거든."

"나도 누군가가 더 있었으면 바랐는데."

"형?"

"누구든. 형도 좋지만 누나라든가, 동생이라든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혼자는 외롭지, 아무래도."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자 나무가 내 어깨를 꽉 붙잡았다.

"우리집에 온 거 환영해.“


나는 붉어진 눈으로 나무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가 준 옷은 나에게 많이 컸다. 내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소매를 잡아올리자, 나무가 실핀을 가져와 소매를 접어 고정시켰다.


"아무래도 옷은 빨리 새로 사야겠다."

"맞아."

"오늘 네가 입고 온 옷은 빨아줄게."

"고마워.“


나무가 초록색으로 물든 옷을 가지고 욕실에 들어갔다. 곧 쏴아-하는 시원한 물줄기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만히 쪼그려 앉아 유리창 밖을 바라봤다. 낮에 본 놀이공원은 어제의 기억보다 훨씬 더 낡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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